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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박광민 (한국어문교육연구회)
저널정보
온지학회 온지논총 온지논총 제64호
발행연도
2020.1
수록면
85 - 135 (51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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廣開土太王勳績碑는 조선시대에도 기록이 보이지만 1874년∼1875년경에 이 碑가 高句麗의 國?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碑라는 것이 밝혀진 이래 東北亞 古代史 연구의 중요한 텍스트로서 韓?中?日 학자들의 많은 연구 論著가 나왔고, 프랑스의 모리스 꾸랑(Maurice Courant)과 에두아르 샤반느(Edouard Chavannes), 소련의 자릴가시노바(Rosa A Dzarylgasinova) 등 西方 학자들의 踏査와 연구도 더해지며 세계적인 연구대상이 되었다. 碑文 解讀은 연구를 위한 가장 기초적 작업이지만 다수의 글자가 磨滅되었고, 碑面이 떨어져 나간 곳도 많아서 비문을 해독하고 再構하는 것이 쉽지 않다. 1875년 이후 國內外 여러 학자의 연구로 많은 것이 밝혀졌지만, 아직도 未讀字가 적지 않고, 비문 해석에 대해서도 논란이 많다. 그중에서도 제1면의 ‘而倭以辛卯年來渡○破百殘○○○羅以爲臣民’ 記事는 가장 尖銳한 논쟁거리였다. 이 부분을 흔히 ‘辛卯年條 記事’라고 하는데 ‘辛卯年條 記事’라는 표현이 적절한지부터 다시 검토할 필요가 있다. ‘百殘○○○羅以爲臣民’은 신묘년이 아니라 乙未年의 裨麗 토벌 記事 아래에 기록되었고, 광개토태왕이 군사를 일으킨 것도 신묘년으로부터 이미 6년이나 지난 丙申年이기 때문이다. 석회를 발라 碑面의 글자를 變造했다는 事實에 대해서도 끊임없는 논란이 이어져 왔고, 그 주체에 대해서도 많은 의혹이 제기되었다. 歷代 어느 古碑도 석회를 발라 글자를 바꾼 경우가 없었다는 점에서 누가 어떤 목적에서 그랬든 석회를 발라 글자를 變造하고 원래의 字形을 훼손한 것은 비난받아 마땅하다. 本稿에서는 廣開土太王勳績碑의 제1면을 중심으로 未讀字를 試釋하면서, 논란이 되어온 諸說도 살펴보고자 한다. 이 글을 통해 작은 史實이라도 밝혀지는 성과가 있다면 그것은 先學들의 연구에 기초한 것이며, 작은 誤謬라도 있다면 그것은 순전히 필자의 寡聞에서 비롯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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