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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권은경 (한국음악사학회)
저널정보
한국음악사학회 한국음악사학보 한국음악사학보 제62호
발행연도
2019.1
수록면
1 - 58 (58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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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덕(金允德, 1918~1978)은 1968년 51세의 나이에 중요무형문화재(重要無形文化財) 제23호 가야금산조(伽倻琴散調)의 예능보유자로 지정된 명인이다. 전라북도 정읍(井邑) 태생인 그는 어려서 농업에 종사하며 정읍지역 명인이었던 김광석(金光錫)에게 가야금풍류를, 김용근(金容根)에거 거문고를 사사했다. 전문적인 교육자이자 연주자로 활동을 시작한 것은 1945년경(28세)으로 다른 연주자들에 비해 활동시작 시기가 늦은 편이다. 1950년 한국전쟁의 발발로 부산으로 피란해 여성국악동호회(女性國樂同好會)의 햇님창극단 교사이자 강습자로 정남희(丁南希)․한갑득(韓甲得)에게 가야금과 거문고를 사사했던 것으로 보이며, 휴전 후 상경하여 라디오방송에도 출연하였다. 1953년 3월에는 국립국악원(國立國樂院)의 예술사(藝術士)로 합격하여 1961년까지 약 8년간 심상건(沈相健) 명인과 함께 재직하였다. 1960년대 대학교에 국악과가 생기기 시작할 무렵, 덕성여대․서울대․서라벌예대 등에 출강하였고, 국악예술학교(國樂藝術學校)에서도 일반교사로서 학생들을 가르칠 뿐만 아니라, 예술부장으로도 활동한 기록에서 그의 교육자적 면모를 살필 수 있었다. 동시대 같은 분야의 무형문화재였던 성금연(成錦鳶)과 비교해보았을 때, 성금연도 교육자로서 활동한 바 있으나 자신의 연주활동에서 더 비중이 있었던 반면, 김윤덕은 비교적 교육자로서 비중이 더 컸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연주활동에 있어서도 그 무게감이 결코 가볍지 않았다. 1965년 서울시립국악관현악단의 창단멤버로 참여하였고, 해외로 전통예술을 알리던 1970년 전후 연주자로서의 김윤덕은 정부에서 해외로 파견하는 한국민속예술단(韓國民俗藝術團)의 일원으로 멕시코와 유럽, 일본(2회)에 거쳐 순회했고, 이의 성공적인 성과로 정부의 문화공보부(文化公報部) 표창을 받았으며 김소희(金素姬)․성금연과 함께 미국순회공연 등을 하였다. 이렇듯 연주자이자 교육자로 활발히 활동하던 김윤덕은 가야금산조 무형문화재인 것에 비해 거문고 연주자로 활동한 기록도 많다. 그는 자신의 음악 토양인 정읍풍류에 애착을 갖고 있었다는 점, 설장구에도 능했다는 점에서 단순한 연주자보다는 전통음악에 일가(一家)를 이룬 사람으로 평할 수 있다. 이런 그가 2년간의 간암 투병 끝에 1978년 숨을 거두면서 30여년간의 음악활동을 갑작스레 끝마치게 되는데, 동시대 명인인 성금연도 비슷한 시기 이민으로 떠나 남한에 없어 가야금산조의 전승이 다시금 어려워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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