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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김용태 (성균관대학교)
저널정보
대동한문학회 대동한문학(大東漢文學) 대동한문학(大東漢文學) 제62권
발행연도
2020.1
수록면
157 - 187 (31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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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보는 19세기 조선의 유명한 시인이었던 신위의 수제자였다. 스승을 따라 박영보 또한 19세기 중반 서울의 유명한 시인이 되었다. 그런데 박영보는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대학자였던 정약용에게 직접 가르침을 받기도 하였다. 정약용은 박영보의 재능을 아껴 학자로서 대성하기를 바랐지만, 박영보는 학자의 길 대신에 관료의 길을 선택하였다. 그렇지만 두 사람의 사제관계는 다산이 삶을 마칠 때까지 이어졌고, 정약용의 가르침은 박영보의 사상과 행동에 적지 않은 영향력을 발휘했다. 박영보의 풍부한 작품세계에서 그 비중이 크지는 않지만, 정약용의 문학과 사상의 영향이 감지되는 시와 산문 작품이 뚜렷이 존재한다. 그 작품들을 통해 박영보는 백성들의 고통을 자신의 아픔으로 여기기도 하고, 수리시설의 필요성을 주장하기도 하고, 군사적 방어시설의 확충을 주장하기도 하고, 수레 제도의 개선을 요구하기도 하였다. 이런 작품들은 정약용의 사상과 일정한 연관 관계를 맺고 있다고 보인다. 그렇지만 박영보를 학자나 사상가로 규정할 수는 없다. 정약용의 사상과 학문을 계승하고 있는 저술이 많지는 않기 때문이다. 박영보는 관료의 삶이 너무 바빠 학문에 전적으로 힘을 기울일 수 없었다. 다만 그는 정약용에게서 배운 애민정신을 실제로 실천하기 위해 모든 힘을 기울였고 성실하게 관료 생활에 매진하다가 결국 과로로 삶을 마감하고 말았다. 이러한 점은 박영보라는 시인을 이해할 때 비중 있게 고려되어야 하며 또한 정약용의 학문이 후학에 의해 활용되었던 한 양상으로 기억되어 마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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