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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금경숙 (삼인역사연구소) 이경화 (숭실대학교)
저널정보
수원교회사연구소 교회사학 교회사학 제16호
발행연도
2019.1
수록면
209 - 247 (39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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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수원 본당은 강원도 횡성군에 자리잡고 있으며 1888년에 설립되었다. 강원도에 천주교신자들이 살게 된 것은 1801년의 신유박해와 관련이 있다. 신유박해로 인하여 강원도 여러 지역으로 귀양을 오거나 박해를 피해 깊은 산이 많은 강원도로 들어와 살게 되었다. 풍수원(豐水院)은 최양업 신부의 후손들이 모여살기도 하였다. 초대 주임신부인 르 메르 신부가 10년간 사목하였고, 2대 주임신부인 정규하 신부가 47년간 사목하였다. 정규하 신부는 1896년부터 1943년까지 47년간 풍수원에서 사목활동을 하였으며 그곳에서 선종하였다. 정규하 신부가 사목하던 시기는 한국근대사에서 격변기이다. 이 시기에 우리의 근대교육이 시작되었다. 근대교육은 식민지 지배 하에서 우여곡절을 겪으며 변화하였다. 풍수원 본당에서 운영한 학교도 이러한 소용돌이 속에 있었으나 그 명맥을 60여년간 지켰다. 본고는 풍수원 본당에서 운영한 학교에 관하여 고찰하였다. 그러나 자료가 매우 부족하여 같은 강원도 내의 성당인 이천(伊川)에 있던 두 개의 본당 즉 망답(望踏) 본당과 포내(浦內) 본당에서 운영하였던 학교와 관련된 자료를 비교하면서 고찰하였다. 강원도 이천의 망답 본당은 1883년에, 포내 본당은 1896년에 설립되었다. 두 곳에는 선교사 신부들이 부임하여 학교 설립에 적극적이었다. 이 지역의 신자들 역시 학교 설립에 적극적이어서 필요한 자금을 모금하거나 교사를 초빙하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또 통감부에서 요구하는 기준에도 부합하려고 노력하였다. 이러한 내용은 그들이 뮈텔 주교에게 보낸 서한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 두 본당에서 운영한 학교는 〈경향신문〉에도 실렸다. 그러나 식민통치를 받게 되면서 이천지역의 많은 신자들이 간도로 이민(移民)을 가, 인구가 감소하면서 학교 운영에 어려움에 처하게 되었다. 이들 학교는 1920년대에는 폐교된 것으로 확인된다. 정규하 신부가 뮈텔 주교에게 보낸 서한은 약 400통에 이른다. 그 편지들 가운데 학교와 관련된 내용은 2~3편에 불과하다. 그리고 풍수원 본당에서 운영한 학교에 관한 기록은 〈경향신문〉에도 실리지 않았다. 다만 조카인 정원진(루카) 신부가 증언한 바에 의해 학교 이름이 ‘삼위(三爲)학당’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학교에서는 금서(禁書)로 지정된 《월남망국사(越南亡國史)》를 가르쳤다고 한다. 일제의 감시를 받던 상황에서 행해진 것이었기 때문에 결국 발각되어 담당교사는 징역을 살아야 했다. 정규하 신부는 이 사건에 관해 뮈텔 주교에게 보고하였다. 삼위학당은 1931년에 ‘성심(聖心)학원’으로 개칭하여 4년제로 인가받았다. 이후 정규하 신부가 1943년에 은퇴하자 2대 주임신부로 부임한 김학용(시몬) 신부는 해방 이듬해인 1946년에 6년제의 ‘광동(光東)국민학교’로 개칭하여 인가를 받았다. 그러나 1970년대부터 시작된 농촌의 이농(離農) 현상으로 인구가 감소되어 1971년 횡성군의 공립학교로 설립자를 변경하지 않을 수 없었다. 1972년에 설립자 변경 이양식을 거행하였다. ‘광동국민학교’라는 교명을 유지하였으나 공립학교로 운영되었고, 학생수가 계속 감소하여 1982년에는 공립인 유현국민학교의 ‘광동분교’로 격하되었다가 1995년에 끝내 폐교되어 역사 속에 남게 되었다. 풍수원 본당이 재정적으로 어려운 상황에서도 학교를 운영한 것은 높이 평가할 만하다. 성당에서 운영하는 학교를 다니던 신자 자녀들은 이곳을 졸업하고 남학생들은 신학교에 들어가 사제가 되었으며, 여학생들은 수녀원에 들어가 수도자의 길을 걸었다. 광동학교는 춘천교구와 원주교의 성소(聖召) 못자리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이 학교는 1965년 원주교구가 설립된 이후에는 교구에서 ‘진광(眞光)중학교’를 운영하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는 점에서 역사적인 의의가 매우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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