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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권오영 (한국학중앙연구원)
저널정보
연민학회 연민학지 연민학지 제32권
발행연도
2019.1
수록면
137 - 187 (51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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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우선 고계(古溪) 이휘령(李彙寜)의 생애를 알아보고, 이어 학문과 사상의 내용을 검토하고, 마지막으로 그의 퇴계학맥(退溪學脈)에서의 위상과 현손(玄孫) 연민(淵民) 이가원(李家源)에게까지 이어지는 가학의 전승을 탐구하였다. 이휘령은 이황의 10세(世) 종손(宗孫)이다. 그는 일찍이 경세치용(經世致用)의 학문에 치중하여 치적(治績)이 당세에 이름이 높았고, 또 가학인 이학(理學)을 깊이 탐구하였다. 그는 이황 이후의 심학(心學)의 전통을 잇는다는 의식이 강하였다. 그는 시(詩)에서 그런 의식을 강하게 드러내었는데, 주희가 「재거감흥(齋居感興)」시(詩)에서 사용했던 ‘추월(秋月)’과 ‘요금(瑤琴)’이란 시어(詩語)를 자주 인용하여 썼다. 그는 다시 주희와 이황의 심학(心學)의 거문고[瑤琴]를 안고 이황의 심학의 옛 곡조[古調]의 메아리를 찾고자 했던 것이다. 한편 19세기 이휘령이 살았던 영남 학계에서는 이황의 적전(嫡傳)이 누구에게 있느냐를 놓고 병호시비(屛虎是非)가 일어나 그 갈등이 심각하였다. 이휘령은 병론(屛論)에 속했지만, 병론과 호론(虎論)이 분열된 뒤에 영남의 연원(淵源)이 있는 고가(古家)가 서로 갈등하여 투쟁을 하자, 양론(兩論) 사이에서 중도(中道)를 지키면서 양론의 보합(保合)을 주장하였다. 이황 이후 진성이씨의 가학은 조선 후기에 그 후손들에 의해 몇 갈래로 전해졌다. 이휘령은 이황 이후 면면히 이어져온 가학을 이었다. 그의 가학은 다시 아들 이만희(李晩憙), 손자인 이중인(李中寅), 증손자인 이상호(李祥鎬) 등에게 전해졌다. 이가원은 어릴 때부터 종숙부(從叔父) 이상호의 문하에 나아가 가르침을 받았다. 이같이 연민학(淵民學)의 출현은 일조일석에 나타난 것이 아니라 이황 이후 이휘령을 거쳐 면면히 이어져온 이학과 가학의 전통에 기초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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