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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박경자 (문화재청)
저널정보
한국중세고고학회 한국중세고고학 한국중세고고학 제10호
발행연도
2021.12
수록면
141 - 165 (25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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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에 전라도 강진 요장(窯場)의 공납자기(貢納磁器) 생산은 14세기 3/4분기에 중단되었다. 이후 공납자기 생산지는 1389년 이전에 강진 이외의 다른 지역으로 옮겨졌고, 1392년 조선 건국 이후에는 충청도·전라도·경상도의 여러 요장으로 확산되었다. 자기의 생산은 특정한 기술력을 지닌 사기장인(沙器匠人)과 가마를 포함한 요업시설을 갖추어야 가능하다. 이 점에서 14세기 4/4분기부터 강진 이외의 여러 요장에서 생산된 공납자기는 특정한 종류의 공물(貢物)을 국가에 대한 신역(身役)으로서 생산한 정역호(定役戶) 공물에 해당한다. 조선은 국가 사무를 수행한 여러 관사의 재원을 공물로 충당하였고 자기는 여러 공물 중 한 종류였다. 조선 초 공물의 조달체계는 크게 분정(分定)과 상납(上納)으로 구분된다. 중앙정부가 공안(貢案) 개정을 통해 공액(貢額)을 정하여 도(道) 단위로 분정하고, 도가 이를 군현(郡縣)에 나누어 정하였다. 공납자기의 경우 지방관이 관할군현의 정역호인 사기장인호로부터 자기를 징수하여 중앙정부에 상납하였다. 1392년부터 1417년 사이에 관사의 재원으로 조달된 자기관련 업무를 수행한 관사에는 사선서(司膳署)와 장흥고(長興庫)가 있다. 사선서는 어선을 포함한 궁궐 안의 음식제공을 담당하였고, 장흥고는 그릇의 관리는 전담하였다. ‘司膳’명과 ‘長興’명자기는 조선 초의 대표적인 공납자기이다. 그러나 1417년 4월에 조선 정부는 공납자기의 양(액수)을 관사별로 나누어 정하고, 이를 분정받은 군현에는 자기를 납부할 관사명을 표기하여 생산하도록 하였다. 이 조치 이후 공납자기에 관사명과 생산 군현명인 지명(地名)이 표기되었다. 이상의 공납자기 생산체계 변화는 태종대의 공안개정 논의, 세종조상정공안이 반영된 것으로 그 결과는 1424년 이후 『世宗實錄』地理志에 139개소에 달하는 자기소(磁器所)로 기재되었다.

목차

국문초록
Ⅰ. 머리말
Ⅱ. 고려 말-조선 초 공납자기 생산지
Ⅲ. 고려 말-조선 초 수취체제의 변화
Ⅳ. 맺음말
참고문헌
Abstract

참고문헌 (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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