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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석소영 (중국 산동대)
저널정보
한중인문학회 한중인문학연구 한중인문학연구 제51호
발행연도
2016.1
수록면
141 - 165 (25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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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강진은 조선과 더불어 명 조정의 삼방포치책(三方布置策)의 중요한 부분으로 명 말 중한관계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인조정권의 ‘오랑캐 토벌에 협력하겠다(协力讨虏)’는 구상역시 동강진 때문에 제기된 것이다. 하지만 동강진의 장수인 모문룡은 후금을 빈번히 교란시켜 조선에 화를 초래했으며 이는 객관적으로 조선과 동강진의 불화를 심화시켰다. 명과 후금이 대립하는 역사적 상황에서 조선이 ‘오랑캐 토벌에 협력하겠다’는 기치를 내걸었던 실질적의도는 명의 비호 아래 이를 이용해 후금과의 정면 충돌을 회피하는데 있었다. 사실 조선은어떻게 하면 군사적으로 명을 지원하느냐 하는 문제보다 어떻게 하면 명과 외교관계의 안정성을 유지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를 더 중시했다. 조선이 오랑캐 토벌에 동참을 표방한 것은사대주의 이념을 실질적 행동으로 옮겨야 한다는 긴박성과 현실성을 이미 자각하고 있음을보여준다. 이러한 상황에서 인조정권은 때마침 정치적 어려움에 처한 천조(天朝)인 명(明)을속국으로서 어떻게 돕고 지켜주느냐 하는 문제에 당면하게 된다. 조선이 동강진의 움직임에주목했던 것은 명과 조선 양국관계 더 나아가 자국의 안위를 걱정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요동이 후금에 의해 점령된 후 조선은 명과 해로를 통해 왕래할 수 밖에 없게 되었다. 이에 따라조선과 동강진의 관계는 당시 명과 조선 양국 관계의 축소판이 되었는데 조선의 명 조정에대한 ‘충성 여부’가 동강진 장수인 모문룡의 상주문에 의해 결정되곤 했다. 모문룡은 조선과명 조정의 정보 교류 및 소통에 보이지 않는 걸림돌이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조선은 모문룡과의 협력관계를 중시하는 동시에 모문룡에 대한 경계를 한시도 늦출 수 없었다. 명에 충의지심(忠義之心)을 보여주고자 했던 인조정권은 부득이 명과 정치적 거리를 유지하게 되는데이러한 도광양회(韜光養晦)하는 정치적 성격은 조선 사대 외교의 현실적 태도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인조반정에 대한 정당성을 해명한 때부터 조선의 ‘숭명사대(崇明事大)의 명분(名 分)’은 이미 모문룡과 밀접한 관계를 갖게 되었다. 하지만 인조반정 해명 때와 달리 모문룡은더 이상 명분상의 위기를 해결해 주는 중재자가 아니었다. 끊임없이 조선과 명의 신뢰관계를 위협하는 역할을 했다. 정묘호란은 조명관계의 중요한 전환점이다. 명과 조선의 종번관계(宗 藩關係)가 후금과 조선의 형제지맹(兄弟之盟)으로 와해되지는 않았지만 전쟁이 조선을 자연스럽게 이원적 외교체제로 향하게 만들었다. 조선은 ‘명분’때문에 곤혹스러웠지만 명의 쇠퇴와 동강진의 혼란 또한 조선을 고통스럽게 했다. 조선은 명과 후금이 대항하는 중간에 서서시비의 양극을 피해 자국의 안전을 꾀하고자 했으며 이 때문에 명에 대한 실제 정책에 있어융통성 있고 유연하게 대응해야 했다. 이러한 의미에서 볼 때 조선은 사대주의 노선에서 점점멀어지고 있었다. 명의 삼방포치책과 조선의 오랑캐 토벌에 협력한다는 계획은 모두 현실화되지 못했는데 이는 모문룡 때문이기도 하고 조선의 자국이익을 우선시하는 정치적 성격이 만들어낸 결과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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