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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이민아 (서울대학교)
저널정보
덕성여자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인문과학연구 인문과학연구 제27호
발행연도
2018.1
수록면
69 - 101 (33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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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도봉서원으로 가는 초입에 위치한 광륜사는 과거 ‘조대비 별서’, 즉 신정왕후의 별서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도봉 별서는 본래 안동 김씨인 김보근 소유였다가 매매 또는 양도 등의 절차를 통해 그 소유권이 신정왕후에게 이전된 것으로 보인다. 신정왕후는 아버지 조만영의 선영지인 춘천지역에 별서를 마련하기가 현실적으로 어려웠기 때문에, 비교적 자신이 거처하는 궁궐과 가까우면서 풍양 조씨 묘역과세거지가 있는 도봉산 자락에 별서를 마련했던 것이다. 이후 도봉 별서는 고종의 부인인 엄비가 머무르는 등 왕실 여성의 공간으로 활용되다가, 식민지기 이후 별서로서의 기능이 완전히 사라졌다. 철종 재위 후반기까지 김보근 소유였던 도봉 별서가 고종대에 신정왕후의 별서로활용되는 과정은, 당시 정치적 역학관계의 변화를 반영하고 있다. 신정왕후의 세자빈 간택으로 외척이 된 이래 풍양 조씨는 안동 김씨의 독단적인 권력 농단을 견제할수 있었다. 그러나 대리청정을 하던 남편 효명세자의 죽음으로 신정왕후와 풍양 조씨는 큰 좌절을 맛봐야 했다. 이후 신정왕후의 아들 헌종의 집권으로 풍양 조씨는다시 안동 김씨를 견제할 수 있는 힘을 얻었으나, 헌종이 후사 없이 요절하는 바람에 결국 안동 김씨에게 권력을 완전히 빼앗겼다. 신정왕후는 철종 사후 흥선대원군과 함께 고종을 즉위시키고 수렴청정을 통해 정치의 중심에 설 수 있었으나, 얼마지나지 않아 흥선대원군의 권력 독점으로 정치 일선에서 배제되고 말았다. 도봉 별서는 이러한 정치적 격변을 거치면서 신정왕후의 공간이 되었고 또 활용되었다. 신정왕후의 도봉 별서, 즉 ‘조대비 별서’는 19세기 정치적 격변 속에서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신정왕후가 권력에서 배제된 뒤 본격적으로 활용했던 ‘아픔’의공간이자, 치열한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비로소 한발 물러나 휴식을 즐기던 ‘안식’의 공간이었다고 할 수 있다. 신정왕후의 죽음 이후 도봉 별서를 이용했던 엄비 역시 일제의 침략이 가속화되는 격변의 시기, 아들 영친왕이 대한제국의 황태자가 되는 영광을 누렸으나 곧이어 영친왕이 일본에 볼모로 끌려가는 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엄비에게도 도봉 별서는 아들 영친왕과 나라를 일본에 빼앗기는 과정을지켜보면서 머물던 ‘아픔’의 공간이자, 말년에 쉼을 얻었던 ‘안식’의 공간이었다. 다시 말해 아름다운 도봉산의 풍광을 품고 있는 도봉 별서는 신정왕후와 엄비 등 고종대 왕실 여인들의 영광과 아픔, 그리고 안식의 공간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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