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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이재환 (중앙대학교)
저널정보
한국목간학회 목간과문자 목간과문자 제27호
발행연도
2021.12
수록면
11 - 34 (24page)
DOI
10.35302/wdis.2021.12.2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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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은 2019년 〈忠州 高句麗碑〉의 비문 前面 상단에서 ‘永樂七年歲在丁酉’라는 年代를 읽어낸 판독안이 〈충주 고구려비〉의 내용 및 정황과 대비할 때 인정 가능한지 확인해 보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 해당 부분은 매우 독특하고 이상한 書寫 方式이나, ‘永□七年歲在[丁酉]’은 충분히 판독 가능하며 두 번째 글자 또한 ‘樂’의 가능성이 높음이 인정된다.
新羅寐錦과 ‘如兄如弟’하기를 願한다는 비문의 인식이 〈廣開土王陵碑〉의 新羅에 대한 ‘屬民’ 인식과 차이를 보인다는 점에 대해서는, ‘如兄如弟’를 원한 주체는 現 高麗大王의 祖先王들이었으며, 고려대왕 당시에 비문 다음 부분에 보이는 服屬 儀禮를 통해 ‘屬民’ 인식에 가까운 관계를 구축하였다고 해석이 가능하다. 비문에 등장하는 太子로는 392년 고구려에 質子로 보내졌다가 401년 귀국 후 고구려의 지원 하에 신라 왕이 되는 實聖을 상정할 수 있다. 신라매금은 12월에 충주 지역의 ‘營’에 도착하는데, 이것이 곧 〈광개토왕릉비〉 영락 10년조에 나오는 신라매금의 ‘身來論事’에 해당한다고 본다.
기존에는 新羅土內에 고구려인 幢主가 존재하는 양상이 영락 10년의 신라 구원전 이후에나 가능하다고 여겨 왔다. 그러나 〈광개토왕릉비〉 영락 6년조에 多年間에 걸친 사건들이 몰아서 서술된 것처럼 영락 9년 및 10년조 또한 辛卯年條 이래의 對신라 관계가 일괄적으로 기록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광개토왕은 396년에 이미 400년의 대규모 파병이 가능할 만큼 竹嶺路를 확보하였으므로 충주 진출이 가능한 상황이었다.
〈충주 고구려비〉에서 신라매금을 소환한 장소는 城이나 村이 아닌 ‘營’이었다. 당시 충주를 포함하는 지역들은 고구려·백제·신라 간에 완충 역할을 하는 ‘接境地帶’로서, 기존의 濊 또는 韓 세력들이 온존된 상태로 존재하였다고 생각된다. 비문에서 ‘諸夷’를 판독하기도 하였는데, 이들이 곧 고구려와 신라 간의 접촉에 참여한 ‘접경지대’의 기존 유력자들로 보인다. 이처럼 397년이라는 시점은 비문 연대 파악의 선택지 중 하나가 되기에 충분하다. 향후 이 선택지를 포함하여 〈충주 고구려비〉에 관한 논의가 더 활발하게 진행되기를 희망한다.

목차

국문초록
Ⅰ. 머리말
Ⅱ. 前面 상단부 橫書의 판독과 年代
Ⅲ. 碑 前面의 내용 파악
Ⅳ. 정황적 검토와 太子의 문제
Ⅴ. ‘接境地帶’로서의 충주 지역
Ⅵ. 맺음말
참고문헌
Abstar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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