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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저널
저자정보
김준선 (서울옥션)
저널정보
명지대학교 문화유산연구소 미술사와 문화유산 미술사와 문화유산 제10집
발행연도
2022.2
수록면
7 - 37 (31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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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계(錦鷄)는 별치(鷩雉)라 불리는 붉은 닭목 꿩과의 조류이다. 수컷 금계는 오색 빛깔의 화려한 깃털로 인해 예로부터 중국에서 문(文)·무(武)·용(勇)인(仁)·신(信)의 오덕(五德)을 갖춘 새로 찬양됐으며, 예로부터 화재를 예방하고 재앙을 방지하는 벽사용과 화려한 자태 덕에 관상용은 물론 수출용, 약용 등의 목적으로 쓰였다.
본 논문에서는 닭 내지 꿩과 혼용되는 ‘錦鷄’가 별개의 조류임을 기반으로, 이를 조선시대 서화를 중심으로 논하는 것이 목적이다. 조선시대 문헌에서 ‘금계’는 ‘쇠 금’자를 쓴 ‘金鷄’와 ‘비단 금’자를 쓴 ‘錦鷄’로 구분된다. ‘金鷄’는 길일을 의미하는 택일(擇日)과 사면령을 뜻하는 계간(鷄竿), 그리고 시구(詩句)의 일부분으로 쓰였다. 또한 ‘金鷄’라 기록하지 않았으나 계간의 의미로, ‘守朝鳴吠’라 쓴 예가 일부 있다. 반면 ‘비단 금’자를 쓴 ‘錦鷄’ 관련 편년서는 전하지 않으나 다양한 문집류에서 그 기록을 찾을 수 있다. ‘金鷄’는 문집에서도 택일·계간·시구가 주를 이루는 가운데, 이밖에도 지형·지명·약재의 의미로 쓰였다. 반면 ‘錦鷄’의 가장 주된 기록은 머리말에서 살펴본 정의와 같이 조류로서의 의미와, 중국의 관복(官服)을 설명하는 금계보복(錦鷄補服)으로 쓰였다. 또한 ‘錦雞’와 관련해 중국의 그림들도 언급되며, 병풍 관련 문헌 기록은 ‘金鷄’와 ‘錦鷄’ 모두 한 건씩 전한다.
‘錦鷄’의 도상이 명확히 확인되는 조선시대 회화로는 허주 이징(李澄, 1581-?)의 《산수화조도첩(山水花鳥圖帖)》(보물 제1985호, 간송미술관 소장)과 傳 이징의 《영모첩(毛畫帖)》(삼성미술관 리움 소장), 傳 죽림수 이영윤(李英胤, 1561-1611)의 <화조도(花鳥圖)> 8폭 병풍(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긍재 김득신(金得臣, 1754-1822)의 <금계도(錦鷄圖)>(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정도가 있다. 조선 내 이징과 이영윤의 화풍은 동시기 같은 신분의 종친화가 이건(李健, 1614-1662)과 이함(李涵, 1633-?) 등에게 영향을 미쳤으며 유사한 그림이 여러 점 전한다. 그러나 이징과 이영윤의 전칭작처럼 조선시대 회화 내 ‘錦鷄’ 도상이 전하는 예가 많지 않다. 첩 혹은 병풍 내 일부분으로서 ‘錦鷄’의 모습이 확인되며, 이른 시기 북송대 휘종(徽宗, 1082-1135)의 <부용금계도(芙蓉錦鷄圖)>(북경고궁박물원 소장)부터 동시대 임량(林良, 생몰년 미상)과 여기(呂紀, 1477-?)의 화조화까지 중국화풍의 영향을 여실히 드러냈다.
조선 후기에 이르러 앞서 살펴본 김득신의 그림 외에는 ‘錦鷄’의 비중은 줄어들고 ‘金鷄’ 도상이 늘어났으며, 그 연유에 대해서 전하는 기록이 없으나 조선 통신사행(通信使行)을 통해 유입된 일본의 증조(贈朝)병풍과 에도시대 박물학(博物學) 연구의 유행이라는 관점을 통해 살펴보고자 한다. 이러한 배경 가운데 조선 후기 ‘黃鷄’를 담은 <금계도> 병풍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현전하는 작품으로는 Ⅱ장에서 언급한 삼성미술관 소장 <금계도> 8폭 병풍(이하 ‘리움 소장본’으로 칭함)과 프랑스 파리 국립기메동양박물관(Musee National des Arts Asiatiques-Guimet) 소장 <금계도> 8폭 병풍(이하 ‘기메 소장본’으로 칭함)이 전하며, 단 폭으로는 온양민속박물관 소장 <금계도>(이하 ‘온양 소장본’으로 칭함)가 있다. 이 병풍들과 도상적, 기법적으로 유사한 회화는 가노파 화가들의 작품에서 찾을 수 있으며, 조류의 형태는 가노파 외에 에도시대 화가 이토 자쿠추(伊藤若冲, 1716-1800)의 도상에서 영향관계를 살필 수 있다. 조선 말기에 이르면 ‘金鷄’는 다른 궁중회화와 마찬가지로 민화의 소재로 쓰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금빛 깃털의 묘사가 점차 사라지고 일반적인 닭의 형태로 자리 잡았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기존에 ‘金鷄’와 ‘錦鷄’를 같은 종으로 인식하고 용어를 혼용해 사용한 부분은 재고되어야 한다. 1891년 수원화성 관련 기록인 『화영중기』에서의 기록을 기반으로 ‘金鷄圖’는 ‘黃鷄圖’로 정리하는 것이 적절해 보인다. 또한 기록을 통해 김홍도에게 병풍 제작을 지시한 정조나 당대 연행을 다녀온 문인들은 이미 실견을 통해 ‘金鷄’와 ‘錦鷄’의 차이를 인지했을 것으로 보이며, 중국의 여러 명화들을 바탕에 둔 채 ‘黃鷄’라는 도상을 선택적으로 차용했을 가능성을 제시하고자 한다.

목차

Ⅰ. 머리말
Ⅱ. 조선시대 ‘금계’ 관련 문헌 기록
Ⅲ. 조선시대 회화에 나타난 금계 도상의 두 가지 경향
Ⅳ. 맺음말
참고문헌
국문초록
Abstra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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