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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전상모 (성균관대학교)
저널정보
한국양명학회 양명학 陽明學 제67호
발행연도
2022.12
수록면
253 - 298 (46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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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일제에 의해 국권이 상실된 1910년대 일제의 식민지 동화주의 문화정책에 맞서 서화가들이 어떻게 대응했는가에 대해 분석한 논문이다.
일제가 행한 일련의 행위는 동화주의 관점에서 식민지 문화 재편이라는 차원에서 추진된 것이었다. 이 시기 동화주의에 대응한 민족문화 보존론과 그 활동은 직접적인 독립론과는 거리가 있었다. 서학활동의 양상은 서화의 사회적 효용이나 동도서기적 서화문명론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훌륭한 주장이라도 친일매국세력과 결탁했다면 달리 해석해야 할 것이다. 다른 사람이 모두 효용론이나 문화론 따위를 말할 때 오세창의 민족문화론은 설파했다. 국망의 현실을 감안한다면 다시 새길 일이다. 당시 서예가들의 동태를 오세창을 중심으로 한 민족인사들의 활동과 이완용을 중심으로 한 친일인사들의 활동으로 나누어 살펴본 결과 민족인사들 사이에도 粹雜이 섞여 있었으며 친일인사들 활동에도 민족인사들과의 인연이 작용하고 있었다. 교육기관은 점차 근대화가 진행 중이었다. 초기의 도사학교는 근대식 교육기관으로 변모해 가는 과도기적 단계에 불과했으며 정규학교의 수업은 허울에 불과했다. 사설 교육기관의 효시인 서화미술회는 총독부와 이왕가 그리고 이완용의 계산이 맞아떨어진 결과였다. 이후 완전한 사설 교육기관들은 개인적인 영달을 위해서 존재했을 뿐 민족문화 창달과는 거리가 있었다. 이시기 각종 전람회와 휘호회는 일제의 식민통치 수단으로 이용되었는데 총독부와 이왕가가 후원했던 ‘서화미술회’가 동원되었다. 창덕궁 어전휘호회, 조선물산공진회의 참가가 대표적이다. <시문서화의과대회>는 형식은 민족문화 보존이었지만 경비는 총독부가 후원함으로써 민족정신과는 거리가 있었다. 그러나 전람회를 통해 서화가 일반 대중에게 공개되고 판매되고 또 그것에 열렬히 호응하는 대중의 존재는 분명히 전에 없던 일이었다. 이 시기 기억해야 할 일은 황실이나 총독부의 도움 없이 순수 민족 서화단체인 서화협회가 결성되었다는 사실이다.
이상의 분석을 통해 1910년대 한국 근대서예의 총체적으로 이해하는 동시에 20세기 한국 서예의 근간을 이해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는데 의의가 있다.

목차

요약문
Ⅰ. 서론
Ⅱ. 시대사상적 배경
Ⅲ. 서학활동의 양상
Ⅳ. 서예가들의 동태
Ⅴ. 서예교육의 분립
Ⅵ. 공개활동의 활황
Ⅶ. 결론
참고문헌
ABSTRA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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