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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김융창 (단국대학교)
저널정보
한국외국어대학교 역사문화연구소 역사문화연구 역사문화연구 제81호
발행연도
2022.2
수록면
103 - 126 (24page)
DOI
http://dx.doi.org/10.18347/hufshis.2022.8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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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黃海道 海州 首陽山이 조선 후기에 伯夷·叔齊의 遺蹟地로 변모하는 양상과 그 의의를 고찰하는 것을 목적으로 작성되었다. 黃海道 海州 首陽山은 중국의 伯夷·叔齊 형제가 은거하여 고사리를 캐먹다가 굶어죽었다고 전하는 그 ‘수양산’과 공교롭게 이름이 같았다. 해주 수양산은 조선 초기부터 여러 문헌에 ‘首陽’이라 기록되어 왔는데, 다수의 조선 지식인들에게 해주 수양산은 우연히 伯夷·叔齊의 그 수양산과 이름만 같은 산이었고, 遼東의 永平府 ?河에 조성된 夷齊廟 근처에 있었던 산이 진정한 수양산으로 인식되었다. 그러나 17세 후반부터 이러한 인식은 반전되기 시작하였다. 해주 수양산에 백이·숙제의 사당이 건립되어 사액을 받았고, 이를 기점으로 여러 지식인들은 백이·숙제의 마지막 은거지가 해주 수양산이라는 주장을 본격적으로 강화하여 나갔다. 해주 수양산에 백이·숙제를 위한 사당인 청성묘가 건립된 데에는 朱喜의 武侯祠 건립이 큰 영향을 끼쳤다. 주희는 기존의 臥龍庵을 재건하면서 後漢의 諸葛亮의 別號 ‘臥龍’과 이름이 같다는 이유로 제갈량을 위한 사당인 무후사를 세웠다. 조선의 지식인들은 설령 해주의 수양산이 이름만 같다할지라도 ‘朱子의 典故’를 따른다는 명분이 있었으므로 그에 대한 거부감이 적었다. 해주 수양산을 백이·숙제와 직접적으로 결부시키기 시작한 것에는 대명의리가 강조되었던 시대 상황과도 밀접한 연관이 있다. 君父처럼 明을 추종했던 조선의 君臣은 明이 淸에 의해 멸망한 뒤에도 明에 대한 의리를 지키며 중화의 계승자를 자처하였다. 이제가 지닌 ‘節義’라는 미덕은 도덕적 교화와 내부적 결속을 강화하는 데 이용할 수 있다. 더 나아가 해주의 수양산이 이제의 마지막 은거지라면 조선의 대명의리를 강조하고 小中華로서의 자긍심을 고취하는 데 크게 기여할 수 있다. 이러한 점에서 수양산 해주설은 시대적 요구에 부합하는 것이었다. 南九萬과 李圭景은 수양산의 위치를 기록한 여러 문헌 기록의 신뢰성이 낮다는 이유로 ‘수양산 해주설’을 부정하였지만, 安鼎福, 徐命膺, 洪良浩, 李鍾徽, 朴趾源, 金祖淳, 洪敬謨 등은 오히려 중국 문헌의 신뢰성이 낮다는 이유, 백이·숙제가 北海 근처로 갔다는 『孟子』의 기록, 箕子의 東來에 기초하여 ‘수양산 해주설’을 적극 지지하였다. 18세기 청성묘의 건립과 사액을 기점으로, 수양산 해주설은 대명의리와 주자학의 전통 속에서 백이·숙제의 마지막 은거지가 해주 수양산이어야 하는 당위성을 강조하는 양상을 보였다. 여기에는 이제를 소환하여 ‘절의’를 천명함으로써 대명의리를 강화하고 小中華로서의 자긍심을 고취하고자하는 조선 후기 조선 지식인들의 간절함이 투영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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