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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임성수 (평택대학교)
저널정보
한국외국어대학교 역사문화연구소 역사문화연구 역사문화연구 제83호
발행연도
2022.8
수록면
79 - 116 (38page)
DOI
http://dx.doi.org/10.18347/hufshis.2022.83.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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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은 숙종 21년(1695)부터 숙종 23년(1697)까지 이른바 ‘을병정대기근’을 거치면서 대규모 주전을 시행한 이후로 한동안 주전을 중지하였다. 동전 발행의 중단은 시간이 지날수록 동전 부족과 다양한 문제를 야기하였다. 가장 큰 문제는 동전을 활용한 債錢이었다. 농민들은 동전을 비싼 값이 구매하여 세금을 납부하였다. 경제력이 취약한 대부분의 농민들은 빚으로 동전을 마련했고, 과도한 이자로 인해 큰 피해를 보았다. 동전으로 인한 문제가 심화되면서 전국에서 상소가 빗발쳤다. 해결책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뉘었다. 하나는 동전이 없던 시기로 돌아가는 廢錢이었고, 다른 하나는 동전을 대량으로 시중에 공급하여 동전 가치를 떨어뜨리는 것이었다. 오랜 錢弊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이렇다 할 대책을 내놓지 못하고 있었다. 주전이 중단된 상황에서 매년 이어진 代錢納으로 정부에는 동전은 쌓여갔고, 시중의 동전은 말라갔다. 그 결과 錢荒이 발생하였다. 전황은 기존 錢弊의 양상을 더욱 심각하게 만들었고, 신하들의 鑄錢 요구도 거세졌다. 영조도 동전 문제를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지만, 그 대책은 신하들과 달랐다. 廢錢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것이 즉위 초반부터 이어진 영조의 입장이었다. 영조가 폐전을 하려는 다름 아닌 ‘爲民’에 있었다. ‘富益富貧益貧’을 심화시키고, 풍속을 해치는 ‘無用之物’로 인해 小民만 피해를 보고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동전은 사라져야할 재화였다. 그러나 대전납을 다시 허용하고, 일부 주전을 재개한 것도 ‘爲民’ 때문이었다. 영조 26년(1750)을 기점으로 영조는 폐전을 포기하고 자신의 역점 사업을 위해 鑄錢을 적극 활용하기 시작하였다. 농민들의 군역 부담을 극적으로 줄여준 均役法 시행이 가장 큰 배경이었다. 주전의 표면적 이유는 흉년과 전염병으로 인한 國用 부족이었지만, 실상은 균역법 이후 발생하는 급대 수요를 보충하고, 結錢 징수와 代錢納 확대에 따른 동전 수요 증가를 대비하기 위함이 더 큰 이유였다. 이 시기부터 영조는 국가의 주요 정책과 재정적 위기마다 동전을 활용하였다. 이는 18세기 후반 이후 동전 사용이 전국에 확산되고, 동전이 조선의 通貨로서 확고하게 자리 잡게 되는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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