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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박성현 (계명대학교)
저널정보
한국외국어대학교 역사문화연구소 역사문화연구 역사문화연구 제79호
발행연도
2021.8
수록면
75 - 108 (34page)
DOI
http://dx.doi.org/10.18347/hufshis.2021.79.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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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신라의 ‘남·북 한산성(漢山城)’을 중심으로 신라가 현 서울 지역, 즉 한강 하류역(下流域)을 점령한 뒤 어떻게 성을 쌓아 확보하고 편제했을까 하는 문제에 대해서 검토, 정리한 것이다. 신라의 남·북 한산성은 『삼국사기』 지리지에 나오는 한산주(漢山州)와 북한산군(北漢山郡)의 성으로 이성산성과 아차산성에 대한 조사와 연구가 진전됨에 따라 각각을 그것에 비정할 수 있게 되었다. 신라는 진흥왕 14년(553) 한강 유역을 차지하여 그것을 신주(新州)로 편제한 직후 기존 한성(漢城, 대체로 몽촌토성) 인근, 영남으로 이어지는 길목에 이성산성을 신축하였다. 또 왕도에서 국원을 거쳐 한성, 평양으로 이어지는 간선 교통로 상에 몇 개의 중간 거점을 더 마련했는데, 특히 한성에서 광진(廣津)을 건넌 곳에 아차산성을 축조하여 한강 이북 진출 및 지배의 거점으로 활용하였다. 신주를 관할한 정(停)의 최초 소재지는 한성, 즉 이성산성으로 파악되며, 그 뒤 남천(南川, 현 이천)으로 이치되었다가 다시 한(산)성 혹은 북한산성으로 되돌아왔다. 통일 전쟁 시기에도 잠시 남천으로 간 적이 있지만, 곧 한(산)성 혹은 북한산성으로 되돌아와서 통일 후에는 한산성이 주치(州治)로 확정되었다. 중고기(中古期) 남·북 한산성에는 각각 도사(道使)가 파견되었으며, 군(郡)의 중심 성으로서 당주(幢主)가 주둔하기도 했을 것이다. 통일기에 들어 현제(縣制)가 도입되면서 북한산성은 북한산군의 군치가 되고 군 영역 내의 골의노성(퇴뫼산성)과 개백성(행주산성)은 각각 골의노현과 개백현이 되었다. 북한산군의 치소(협의)는 통일 후에도 일정 기간 산성 내에 유지되었을 가능성이 크지만, 산성 아래 광진 주변으로 시가지가 형성되어 읍(邑, town) 정도의 공간을 이루게 되었을 것이며, 시기를 특정하기는 어렵지만 치소 역시 결국 그곳으로 이전되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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