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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나상필 ((재)한국학호남진흥원)
저널정보
동양고전학회 동양고전연구 동양고전연구 제85호
발행연도
2021.12
수록면
137 - 162 (26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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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글은 16세기 후반 호남의 나주 지역에서 향권의 주도권을 쥐고 정치적?사상적으로 영향력을 미친 정개청과 그의 문인인 나주나씨 일가 나덕명 형제가 동인과 서인의 갈등에서 발생한 기축옥사로 정개청이 옥사에 피화된 배경과 정개청 사후 신원을 위한 당시의 양상을 나덕명 형제의 상소를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정개청은 전라도 무안의 윤암정사에서 은거할 때 나덕명 형제와 강의계로 사제 관계를 맺고, 1582년 나덕준이 나주 대안동에 서재를 마련한 뒤 훈장으로 초빙하면서 동인과 서인이 공존하는 나주에 정개청은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한다. 그해 나주 향교의 훈도로 천거된 뒤 정개청은 나주의 유력사족 자제들을 지도하면서 서인의 질시를 받게 되고, 나주 최초 서원인 경현서원에 원장으로 임명되면서 동인과 서인의 갈등은 고조된다. 1589년 기축옥사의 발생으로 호남의 동인 대부분은 옥고를 치르고, 정개청도 정여립과 친분 관계, 「동한절의진한청담설」의 서술 때문에 옥사의 희생자가 된다. 기축옥사 이후 임진왜란이 발생하고 의병 활동으로 전공을 세운 나덕명 형제는 세력을 회복하며 정개청의 신원에 돌입한다. 이외에 호남 지역과 성균관 소속 유생들의 상소, 조정 강회 시간에 대신들의 신원 요청 등 조야를 막론하고 정개청 신원을 요청하여 1625년 2월 관작의 회복으로 신원이 되지만, 신원 이후 18세기 초반까지 정개청과 관련된 논란은 끊임없이 이어진다. 정개청은 대대로 한미한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학문과 사상이 조선 사회에서 얼마나 큰 영향력이 미쳤는지 신원 운동을 통해 알 수 있고, 그에 대한 일조를 한 문인은 나주의 사족인 나주나씨 나덕명 형제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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