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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배우성 (서울시립대)
저널정보
한국고전번역원 민족문화 민족문화 제69집
발행연도
2025.3
수록면
245 - 280 (36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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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나주정씨 가문이 대원군 권력과의 접촉면에서 구사한 생존 전략을 묘사해보려 한 것이다. 1866년(고종 3) 丁學洵이 『경회루전도』라는 이름의 얇은 책자를 바쳤다. 그는 장차 지어질 누각의 구조를 역리로 풀어냈을 뿐만 아니라, 그 역리로 制火의 욕망을 정당화했다. 또 다른 나주정씨 정대림이나 정대식은 중건공사의 실무자로 일하면서 권력의 의제를 공유하기도 했다. 그들은 그 장소를 통해 권력과 대면하고 권력에 나름의 방식으로 참여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들이 그렇게 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남인을 등용하여 세력 기반으로 삼으려 했던 대원군이 있었다.
1870년(고종 7), 남촌 남인들이 長洞에 있는 韓敬源의 집에서 시모임을 계획했다. 소식을 들은 대원군이 이 기회에 남인 가문들을 화해시키려 했다. 해혐에는 정대조, 정대식 등 나주정씨들도 참여하면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들의 혼맥 · 학맥 · 교유권 속에 남인 유력 가문이 망라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한경원의 집이 있던 회현방은 정약용이 살던 곳이기도 하다. 20대의 정약용에게 남촌은 서학과 천주교를 상징하는 장소였다. 결국 서울의 남인들이 한경원의 집에 모여 해혐한다는 것은 천주교 문제를 둘러싸고 그 장소에 얽혀 있는 오래된 갈등을 치유한다는 의미도 있었다.
그즈음 새로운 『나주정씨족보』가 편찬되었다. 편찬자들이 무엇보다 의식했던 것은 천주교 문제였다. 그들은 정약종과 정철상 · 정하상, 그리고 정약현의 두 사위 등 순교자들을 모두 덜어냈다. 정약전과 정약용을 수록했지만, 천주교에 대해서는 일체 거론하지 않았다. 그들은 道學 · 文章 · 仕官 · 出處같은 기준을 내세우며 가문의 정체성을 재정립하려 했지만, 최소한 한때는 신자였을 정약용을 그 기준으로 정당화할 수는 없었다. ‘백여권의 저서를 남긴 저술가’라는 식의 건조한 설명은 그런 딜레마의 산물이었다. 정약용의 후예들이 주도한 족보 서문에서 정약용이 거론되지 않는 역설은 그렇게 가능해진 것이다. 그렇게 나주정씨 가문은 대원군 집권기를 살아냈다.

목차

1. 머리말
2. 남촌의 남인과 정씨들
3. 족보와 기억의 재구성
4. 맺음말
참고문헌
국문초록
Abstract

참고문헌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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