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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이성운 (동방문화대학원대학교) 문기조 (문헌 세계불학원)
저널정보
한국불교사연구소 한국불교사연구 한국불교사연구 제20호
발행연도
2021.12
수록면
93 - 128 (36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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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傳’고녕가야왕릉과 왕비릉의 위치라는 주제 아래 논의를 펼쳤다. 기록의 빈약 속에 역사와 신화가 혼재된 상태라 그것을 바라보는인식의 차이는 적지 않은 것 같다. 고녕가야의 도읍이 함창일 수 없다는 그간의 역사 인식 속에서, 태조왕릉과 왕비릉이 적어도 400년 이전에 복원 정비되어 있고, 『삼국사기』를 위시한 후대 사서의 한결같은 지적에도 불구하고, 함창의 고녕가야는 역사의 중심에서 논의조차 되지 못하고 있었다. 고녕가야의 역사는 신화로 각색되었지만 인간의 삶으로 분명하게 전개되었다. 공갈못의 공갈이 고녕가야의 음약(音約)이라고 파악한신채호의 고녕가야 함창설은 설득력이 적지 않다. 고녕가야의 왕도로 알려진 왕도골, 대가산 등 고녕가야 왕들과 관련한 지명은 고녕가야의 흔적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으며, 그 중심에 공갈못이 자리하고 있다. 고로왕릉과 왕비릉은 16세기말 비석이 발견되어 복원되었는데, 태조왕릉과 왕비릉은 동서로 자리하고 있다. 서쪽의 왕릉은 계좌(癸 坐)를 하고, 동쪽의 왕릉은 임좌(壬坐)를 하여, 200여 미터 相距한 왕과 왕비가 마치 여덟팔자(八) 형식으로 왕도와 왕도 앞의 고분군을바라보며, 지켜주는 형국이다. 두 능의 위치와 좌향이 조성 당시부터 그랬는지 16세기 이후 정비되면서 그랬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현재의 모습은 그렇다. 3세기 중반에 사라진 고녕가야이지만 고로왕의 후예들은 그 조상을잊지 않고 왕릉과 왕비릉을 지키며 2천여 년의 역사를 관통하며 번성해나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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