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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이지선 (숙명여자대학교)
저널정보
국립국악원 국악원논문집 국악원논문집 제44호
발행연도
2021.10
수록면
245 - 290 (46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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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서는 조선신궁의 예제에서 연행된 악무를 고찰하여, 일본 황실과 조선총독부 관련 의례에서의 조선 아악의활용 양상과 역할에 대해서 밝히고자 했다. 조선신궁은 일본 황실에서 폐백을 받는 관폐대사로서 창건되어, 1925년10월 17일 제1회 예제를 시작으로 일본이 패망하기 전까지 매해 같은 날 제의를 거행했다. 예제는 단순한 신사의행사가 아니라 조선총독부에서 관리하는 국가 차원의 제사였다. 총독부는 조선신궁의 창건부터 제반 사항, 참배자 동원등 모든 면에서 관여했으며, 예제에서 사용될 “악무 제정”을 위해 궁내성 악부와 긴밀하게 협력했다. 예제 의식 중에 연주된 제사악은 기악편성의 가구라 또는 가가쿠 중 도가쿠로, 신전의 문을 열고 닫을 때, 신찬을올리고 물릴 때 배경음악으로 사용되었다. 의식 후에는 봉납가무가 연행되었는데, 가구라 춤은 1934년 예제에서 처음등장하는 반면에 이왕직아악부가 연주하는 조선 아악은 이보다 8년이나 이른 1926년 제2회 예제부터 시작되었다. 아악은 매년 제례악과 연례악으로 구성된 6~8곡이 연주되었다. 악곡은 총 37곡으로, 제례악이 7곡, 연례악이 30곡이다. 초기에는 제례악이 중심이었으나 시간이 갈수록 연례악의 비율이 높아지고 1940년대에 이르면 연례악만 연주되었다. 이는 조선 아악의 역할이 신에게 봉납하는 음악에서 점차 일반인들을 위한 여흥 음악으로 변해갔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예제에 참여한 이왕직아악부원들은 16~20명이었고 아악사장이 직접 인솔한 것으로 확인된다. 또한 무악이 연행되었던 1935년과 1939~1941년에는 30여 명이 동원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조선 아악은 총독부의 식민정책을 선전하기 위한 시각적 이미지로도 활용되었다. 1939년 조선신궁에 건립된 황국신민서사지주의 정면에는 일본 국가 <기미가요>를 조선 악기로 연주하는 이왕직아악부의 모습이 동판으로 조각되었다. 이는 조선의 궁중문화가 일본문화의 일부라는 것을 가시화하려는 시도였고, 1920년대부터 궁내성 악부가 구상해 온“아악을 통한 내선일체”를 실천해가는 것이었다. 조선총독부와 궁내성 악부의 개입으로 시작된 조선신궁 예제의 악무는 제사악과 봉납가무라는 형태로 내지의 신사음악 관행 그대로 연행되었다. 제사악은 의식을 진행하는 관계자 외에는 직접 볼 수 없었던 반면에 봉납가무는 누구나관람이 허용되었기 때문에 궁중 악사들이 연주하는 조선 아악은 신사에 참배객을 운집시키는 데 매우 효과적인 수단으로 작용했다. 조선신궁에서의 조선 아악은 총독부의 통치 권력과 조선 황실의 굴욕을 보여주는 것이었지만 한편으로는궁궐에서만 향유되던 음악이 공개된 장소에서 정기적으로 연주되었다는 점에서 볼 때 일반인들이 향유할 수 있는 음악의 범위를 넓히는 역할도 했다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조선신궁 예제”는 궁중음악의 전용(轉用)과 음악 문화의 확장이라는 양상을 동시에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한국근대음악사 연구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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