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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나영남 (한국외국어대학교)
저널정보
중국사학회 중국사연구 중국사연구 제143호
발행연도
2023.4
수록면
91 - 124 (34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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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대 국호에 관한 문제가 어떠한 연원을 지니고 있는가를 구명하고자 한다. 일반적으로 그들의 국호를 遼라고 통칭하였으나 실제로는 사료마다 차이가 있다. 남송의 葉隆禮는 거란의 역사를 『契丹國志』라고 일컬어 썼고, 원나라 史家는 정사를 『遼史』라고 칭하여 편수했는데 이는 저마다 근거하는 바가 달랐기 때문이다. 확실히 국호의 변경은 한 나라의 정치사에서 매우 중요한 사건인데도 불구하고 각종 사서에서 그 내용의 누락이 심해 쉽게 파악할 수가 없다. 하지만 한 나라의 국명을 제멋대로 부를 수 있는 것이 아니므로 대거란과 대요로 구분해 사용한 것은 분명 국호의 변경에 따른 것으로 추정된다. 916년 요 태조 야율아보기가 건국할 때 요조의 통치구역은 장성 이북에 국한된 유목국가였기 때문에 국호를 부족명에 따라 “大契丹”이라고 불렀다. 그 후 938년 석진이 연운16주를 요조에 정식으로 할양했으므로 요 태종은 연운 16주에 새로운 국호인 “대요”를 만들어 일국이체제를 구축했다. 그러나 947년에 태종이 석진을 멸망시키고 汴京에서 진국을 대요로 개칭하였으므로 대요라는 연운16주의 국호를 중원까지 확장했으나 태종이 북으로 돌아온 후에 중원은 곧바로 주인이 바뀌어 이후 “大遼”의 국호는 단지 연운 16주에서만 사용되었다. 이와 동시에 장성 이북의 거란 본토는 여전히 대거란을 국호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이중국호를 사용했다. 그리고 거란의 전성기인 성종때 송의 침략을 물리침으로써 연운16주가 확고하게 거란의 영토임을 확인받은 후에 국호를 거란으로 통일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거란 본토는 1065까지 줄곧 거란이라는 국칭을 사용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후 한화된 도종이 함옹2년(1066)에 국호를 다시 대요로 바꾼 후 거란이 멸망할 때까지 그대로 사용했던 것이다. 이상과 같이 대거란과 대요로 구분해 사용한 것은 분명 국호의 변경에 따른 것으로 추정된다. 그동안 의견이 분분하였으나 사료의 내용을 전적으로 부정할 수 없는 일이고 석각자료 및 외교문서도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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