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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곽명준 (경북대학교)
저널정보
대구사학회 대구사학 대구사학 제151권
발행연도
2023.5
수록면
157 - 196 (40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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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두품은 頭品 중에서 가장 높은 신분이지만 大阿湌 이상의 높은 관등에 오르지는 못했다. 이러한 한계로 인해 신분의 제약을 덜 받는 학문과 종교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경우가 많았다. 또한 6두품은 신라 말기에 폐쇄적인 骨品制를 개혁하려 하였고, 고려시대에는 신라계 지식인으로 활동하면서 개혁정치를 지속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6두품 출신 인물들의 활동을 보면 중대와 하대에 차이가 있었다. 중대에는 6두품 출신 인물들이 주로 국왕에게 협조적이였으나, 하대에는 진골과도 협력하는 등 그들의 조언자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리고 이들은 國學, 讀書三品科, 渡唐留學 등을 통해 執事侍郞으로 진출하든가 아니면 文翰職, 近侍職으로 나아가 위상을 높여갔다. 실제로 「保寧 聖住寺 朗慧和尙塔碑」의 得難條를 보면 비문이 찬술된 진성여왕 당시 6두품의 위상을 짐작할 수 있다. 비문에 나오는 國有五品은 聖而, 眞骨, 得難, 四品, 五品이고 得難은 6두품이었다. 得難은 貴姓이 어렵게 얻어진다는 의미이며, 貴姓은 귀한 성씨라는 의미로 당시 6두품의 위상이 높아졌음을 보여주는 용어로 판단하였다. 진성여왕 이전 경문왕·헌강왕 시기에 문한직과 근시직이 확대되면서 6두품 세력의 중요성이 커졌는데, 이러한 상황은 진성여왕 때까지 이어졌다. 그러나 흥덕왕이 반포한 금령의 내용을 분석하면 得難이라는 표현과 달리 6두품을 규제하는 항목이 많았다. 이를 신분별로 분석한 결과 진골과 6두품 간의 격차가 크고, 6두품과 5두품 사이의 격차는 작게 나타났다. 흥덕왕 시기에는 6두품에 대한 규제가 강해지면서 이들의 지위는 하락하였다. 흥덕왕 시기의 금령에서 6두품에 대한 규제를 강화한 원인은 金憲昌의 반란 때문이었다. 반란을 진압한 다수의 인물들은 흥덕왕의 친척을 중심으로 한 진골이었고, 자연히 이들의 영향력이 강해졌다. 반란이 진압된 뒤 흥덕왕은 반란을 수습하기 위해 진골 위주의 정국을 운영하였고 이에 따라 금령에도 진골의 특권 강화와 6두품의 위상 하락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경문왕과 헌강왕대에 근시직과 문한직이 확장되면서 6두품은 진출 분야를 확대해나갔는데 이는 6두품의 위상이 다시 높아졌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렇듯 6두품은 위상의 승강을 거쳐 골품제 변화의 주역이 되었고, 마침내 골품제라는 신분제를 개혁하는 주역으로 등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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