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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널정보
서울시립대학교 서울학연구소 서울학연구 서울학연구 제93호
발행연도
2023.11
수록면
1 - 34 (34page)
DOI
10.17647/jss.2023.11.9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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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대 후반 서울의 도시화는 필연적으로 주택문제로 이어졌다. 아직 한국전쟁으로 파괴된 도심의 복구가 미처 되기도 전에 농촌의 인구가 도시로 집중되었기 때문이다. 이들이 양산한 무허가 판자촌은 각종 재해에 취약했을뿐더러 제도에 포섭되지 못했기 때문에 이에 대한 해결책이 필요했으나 당시로서는 여력이 없었다. 때문에 이러한 도시의 빈민 문제 해결에 유엔이나 미국의 원조기구, 그리고 민간 단체로서 외원단체가 개입하게 되었다.
1958년도에 발생한 이촌동 수재민을 응암동에 정착시키려고 했던 응암동 재정착 사업은 이러한 점을 잘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이다. 응암동 사업에 대한 각종 기록을 통해서 우리는 1950년대 후반 서울의 도시빈민의 삶의 모습을 짐작해볼 수 있다. 도시빈민에 대한 이후의 고착화된 이미지와 달리 이 시기 도시빈민은 주거가 불안정했을 뿐인 평범한 도시민이었다.
한편 주택을 비롯한 물자가 절대적으로 부족하던 전쟁 복구 시기에 기독교계 외원단체에서도 도시빈민을 위해 각종 사업을 수행했는데 주로 급식소를 통한 물자 보급 등 구호활동이었다. 그렇지만 1950년대 후반에는 슬슬 활동 방향의 전환이 모색되었다. 응암동 사업을 통해 알 수 있었던 바에 따르면 이러한 전환은 사회복지사의 파견을 통한 정서적 돌봄, 그리고 커뮤니티 센터(사회관)를 통한 지역 주민들의 훈련과 조직화를 포함했다. 이러한 외원단체의 사업은 비록 외부의 지원에 크게 의존했다는 한계는 있으나 지역의 사람들을 통해서 공동체의 변화를 추동하려고 했다는 점에서는 의미가 있다. 이 시기의 경험이 이후에 도시빈민의 문제가 더 큰 사회문제로 대두되었을 때 본격적인 기독교의 사회참여 활동으로 이어지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응암동 재정착 사업은 이촌동 수재민을 응암동 지역에 정착시킨다는 초기의 목표는 달성하지 못했다. 그렇지만 도심의 성장에 따라 응암동 사업장 주변으로 주택가가 형성되었으며, 기독교계 외원단체의 활동 전환을 모색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는 의미가 있다.

목차

Ⅰ. 머리말
Ⅱ. 1950년대 후반 서울의 도시화와 외원단체의 활동
Ⅲ. 응암동 사업의 배경과 전개
Ⅳ. 응암동 사업의 경과와 영향
Ⅴ. 맺음말
참고문헌
국문초록
ABSTRA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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