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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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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널정보
한국민화학회 한국민화 한국민화 제19호
발행연도
2023.12
수록면
206 - 237 (32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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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민간화가 한응숙(韓應淑, 19세기 활동) 및 그의 기명작인 〈책거리 병풍〉을 둘러싼 제작 맥락에 대한 탐구이다. 책거리 그림에는 기물로 그려진 인장에 제작자의 이름을 남기는 은인(隱印)의 전통이 있었다. 따라서 한응숙의 성명인(姓名印)이 그려진 〈책거리 병풍〉은 통념상 그의 작품으로 귀속된다. 그런데 기명작(記名作)이 반드시 진작인 것은 아니다. 또한 화가의 이름을 알 수 있다고 하여 작가에 대한 정보가 충분히 제공되었다고도 할 수 없다. 한응숙 역시 〈책거리 병풍〉을 통해서 지금까지 그의 이름만 알려져 있을 뿐 그의 삶과 행적에 대헤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었다. 그런데 고종 재위기에 왕실의 행사에서 장황인(粧潢人)으로 참여한 인물 중에서도 ‘한응숙’이라는 인물이 발견된다. 그는 원래 사자관(寫字官)이었으며 한응창(韓應昌, 19세기 활동), 한응엽(韓應曄, 19세기 활동)과 같은 집안의 사람들과 함께 장황 기술자로 활동하였다. 필자는 이 사실에 주목하여 한응숙을 둘러싼 맥락적인 정보를 토대로 한응숙 및 그의 가계의 행적과 함께, 〈책거리 병풍〉이 제작된 배경을 재구성하였다.
사자관을 다수 배출한 기술직 중인 가계인 청주한씨 일가는 헌종대 무렵부터 장황 기술자로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이들은 고종 재위기에는 승문원(承文院)에서 사자관으로 활동하는 동시에 민간에서는 장황 작업을 위한 공방을 운영했을 것으로 유추된다. 고종 역시 국가 행사를 준비하기 위해 청주한씨 일가에 대량의 병풍을 주문하였으며, 청주한씨 장황 기술자들이 병풍의 제작을 마칠 수 있도록 서역(書役)을 일시적으로 면제시키기도 하였다.
장황에 숙달된 한응숙이 책거리 그림을 그리게 된 배경에는 청주한씨 장황 기술자들이 공방 사업을 확장 시키고자 하는 의도가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오늘날 기록물을 통하여 확인되는 장황 작업은 회화와 유사하게 친교를 매개로 한 수응의 방식으로 이루어졌거나 유력자의 후원을 통하여 이루어졌다. 그런데 조선시대 후기부터 두드러진 미술시장의 성장은 장황의 용역거래 역시 비슷한 시기 미술시장으로 편입되었을 가능성을 보인다. 1920년대까지도 장황되지 않은 그림, 특히 병풍차(屛風次)는 미술시장 내에서 수요의 주축을 이루었다. 따라서 유통된 그림을 장황하는 기술자 역시 미술시장의 구성원으로 기능하였을 것이다. 장황 공방의 운영이 장황 용역에서 비롯된 통한 수익 위주로 운영되었으므로, 공방에서 그린 그림을 장황하여 판매하는 전략은 추가적인 수익을 올리기 위한 방법으로 고안되었을 개연성이 크다. 따라서 한응숙의 〈책거리 병풍〉은 청주한씨 장황 기술자 일가가 완제품의 서화 병풍을 판매하고자 한 시도로서 제작되었다고 생각된다.

목차

Ⅰ. 서론
Ⅱ. 〈책거리 병풍〉의 시각적 분석
Ⅲ. 사자관(寫字官) 한응숙과 그의 가계(家系)의 장황 활동
Ⅳ. 미술시장으로 편입된 장황 기술자
Ⅴ. 결론
참고문헌
국문초록
ABSTRA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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