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읍은 부안, 김제, 고부 등 한국 최대의 비옥한 곡창지대를 끼고 있는 경제적으로 풍요로운 고을이었으며, 사액서원인 무성서원을 중심으로 호남 유림의 학문적 중심이 되었던 곳이다. 채용신은 1908년 무렵부터 정읍과 인연을 맺고 왕래하며 회화 활동을 했던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 발단은 최익현 초상화의 제작이 계기가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최익현의 생애 마지막 활동 무대가 되었던 정읍은 호남 유림의 학문적 중심이자 우국충절의 구심점이었던 곳으로서 채용신 또한 이 곳에서 자신의 방식으로 애국심을 불태웠던 것으로 이해된다. 이후 일제 치하에서 정읍은 인근에서 생산되는 쌀이 총집결되고 도정되어 수송되는 산업과 물류의 중심지로 급성장하게 되고, 채용신에게 정읍은 전혀 다른 의미에서 새로운 가능성의 장소로 다가왔을 것이다. 이는 1923년 무렵 채용신이 금마에서 정읍으로 공방을 옮겼던 배경이 되었을 것이다. 정읍 무성서원은 신라말 태산태수로 부임한 최치원이 배향된 곳으로서 숙종 연간에 사액서원이 되었고, 1868년 대원군의 서원 철폐 때에도 존치되었던 유서 깊은 서원이다. 1784년에 하동 쌍계사에서 <최치원 영정>을 인수하여 봉안하였으며, 1831년에 이모본 제작이 있었고, 1924년에는 채용신이 영정의 이모를 맡아 제작하였다. 『무성서원원지』(1884년刊)와 『무성서원지』(1936년刊) 중의 기록을 토대로 <최치원 영정>의 이안 과정과 이후의 이모본 제작 경위를 살폈다. 채용신의 1924년 <최치원 영정>은 1831년본을 원형대로 매우 정확하고 정밀하게 잘 옮긴 초상화라 할 수 있다. 채용신 초상화의 특장인 육리문(肉理紋)의 표현이 전혀 없는 점은 그만큼 모본(母本)에 충실했음을 말해준다. 다만 수염과 귀털 등의 세부에서는 모본에 비해 더욱 유연한 필선을 구사하여 채용신 특유의 사실성이 살려졌다. 또한 의자의 장식이나 화문석의 추가 등 새로운 요소를 가미하거나 음영 표현이 강화된 부분이 있지만 채용신은 최대한 원형을 해치지 않도록 배려하였음을 볼 수 있다. 또한 정읍 태인의 향반으로서 무성서원의 운영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김직술의 의뢰로 채용신이 제작하였던 고사도(故事圖) <칠광도>와 <송정십현도>를 살펴보았다. 두 작품의 주제는 광해군 대에 고현내에 은거하여 ‘나라가 쇠망함을 달래’고자 한 7인의 ‘칠광’과 ‘십현’의 고사이지만, 실제로는 1899년 후송정을 건립하고 이를 기리기 위한 그림이었음을 살펴보았다. 이는 1621년 선조들이 송정을 짓고 수계를 행하며 <칠광도>와 <십현도>를 그려 행적을 남겼던 일을 계승한 것이었다. 삼백년 가량의 시차를 두고 선현(先賢)들이 겪었던 정치적 혼란과 유교적 가치의 붕괴 상황 등이 그들의 현실과 중첩되는 것을 지켜보며 선조들의 우국충정을 기리고 되살리고자 한 염원을 담고자 했던 것이다. 채용신이 이를 회화 작품으로 풀어내었던 것은 우국 열사들의 뜻이 뜨거웠던 항일의 중심지 정읍을 활동무대로 하며 그들의 뜻에 동참하고자 했기 때문일 것이다.
Jeongeup was an economically prosperous town with the largest fertile granaries in Korea, including Buan, Gimje, and Gobu, and became the academic center of Confucian scholars in Honam, centering on Museongseowon Confucian Academy, a private Confucian academy. Jeongeup Musungseowon Confucian Academy is a place where Choi Chi-won (崔致遠, 857~?) who was appointed as Taesan Taesoo at the end of the Silla Dynasty, Shin Jam (申潛, 1491~1554) who was appointed to the Myeongjong University of Joseon, and Jeong Tae-in (1401-1481), Song Se-rim(1479~1519), Jeong (1479~1557), Kim Yak-mook(1500~1558) and Kim Kwan(1575~1635) are enshrined. In 1696 (the 22nd year of King Sukjong"s reign), it was recognized as Saakseowon Confucian Academy and was called Museongseowon Confucian Academy. In 1868 (the 5th year of King Gojong"s reign), when Heungseon Daewongun abolished the Confucian academy, Museongseowon Confucian Academy was retained and its status was further enhanced. In the early 20th century, it can be said that the role and meaning of Museongseowon Confucian Academy were more important mentally and physically. It was not only the academic center of Confucian scholars in Honam, but also the center of the martyrs who resisted the Japanese invasion of national sovereignty and burned down the loyalty of the country. The fact that Yong-shin(1850-1941), who was famous as Eojin Hwasa, had a workshop in Geumma-myeon, Iksan, but traveled to and from Jeongeup and engaged in painting activities, and by 1923, the fact that the workshop was moved to Jeongeup must have been due to the location of Jeongeup. This study aims to examine the historical and economic characteristics of Jeongeup during the turbulent period of the early 20th century and the painting activities carried out by Yong-shin in the context. In particular, we focused on the work activities that took place in relation to the scholars related to the of Choi Chi-won, who was enshrined in Taesan Temple, a space for incense in Museongseow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