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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장종진 (서강대학교)
저널정보
서강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서강인문논총 西江人文論叢 第70輯
발행연도
2024.8
수록면
115 - 154 (40page)
DOI
10.37981/hjhrisu.2024.8.70.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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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해도지역은 조선 후기에 서울의 곡물공급지이자 곡창지대로 위치했다. 황해도가 이 시기 높은 농업생산성을 가진 데에는 관개시설의 발전이 한 요소가 되었다. 이 연구에서는 18세기 중엽부터 20세기 초까지 발행된 지지류를 토대로 황해도 내 제언과 洑의 시기, 지역별 변동양상과 그 특성을 검토하였다.
1760년 이후 황해도 내 제언 수는 英祖대 이후의 점진적인 증가와 19세기 후반기의 확대, 1910년대의 감소를 확인할 수 있다. 황해도에서 제언은 지리적 특성으로 인해 숫자는 적지만 큰 규모로 축조되었다. 이러한 제언의 확대는 18세기 이후 개간의 활성화에 따른 것이다. 1911년 전후까지 제언이 다수 소재했던 지역은 재령강 유역이었다. 이러한 제언은 1919년에 1/3정도로 감소하였다.
황해도 내 洑가 급증하는 것은 20세기 초이다. 洑는 1911년에 275개소, 1919년에 368개소로 크게 확대되었다. 지역적으로는 1900년 전후에 재령강 유역에서 洑가 증가했고, 1910년대 이후에는 예성강과 대동강 상류, 특히 황해도 동북부 지역에서 洑의 증가세가 두드러진다. 이러한 양상은 기존 평야지역 외에 경지 확보를 위해 하천의 지류를 활용한 소규모의 洑 축조가 활성화되고, 관개기술의 발달로 황해도 동북부지역의 개발이 확대되면서 나타난 것이다.
20세기 초, 황해도지역의 洑 확대는 당시 지역민의 농업 생산력 제고 노력과 관련이 깊다. 이 시기는 일제의 수리조합정책이 지역에 실시되기 이전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일제 강점 초기 각 지역 관개시설의 발전 및 변동 현황과 그 특성이 파악된다면 당시 조선 사회의 모습에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목차

국문초록
1. 머리말
2. 관개시설의 지역별 분포
3. 관개시설의 축조와 운영
4. 맺음말
참고문헌
Abstract

참고문헌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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