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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박수정 (동서대학교)
저널정보
한국고대사학회 한국고대사연구 한국고대사연구 제115호
발행연도
2024.9
수록면
391 - 422 (32page)
DOI
10.37331/JKAH.2024.09.115.3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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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892년 自署부터 900년 후백제 건국과 稱王을 거쳐 927년 신라 景哀王을 죽이고 왕건에게 서신을 보내기까지, 견훤의 신라 인식을 검토해 보고자 마련된 것이다. 견훤은 興起 후 892년 武珍州를 거점으로 삼아 자서하면서 ‘신라서면도통 지휘병마제치’를 관칭하였다. 이는 대외적으로 신라를 앞세워 스스로 반역자가 아님을 강조하고, 그가 지역의 혼란을 잠재우고 민심을 수습하는 역할을 했음을 드러내기 위해 사용한 관함으로써 일견 조심스러운 측면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는 이때 이미 신라와 구별되는 새로운 나라를 만들고자 하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고, 지방관의 명칭을 자의로 사용하고 양길에게 裨將직을 제수하는 등 신라 왕권을 인정하지 않는 태도를 보이기도 하였다. 이후 900년 정식으로 후백제왕을 칭하면서, 마한이 신라 혁거세의 개국보다 앞섬을 강조하고 마한계승의식 및 삼한일통의식을 천명하였다. 또한 백제의 멸망과 의자왕의 울분을 들어 신라에 대한 적대감을 선명히 하였으므로, 이때 ‘신라’를 관칭하는 ‘신라서면도통’의 관함을 버리고 ‘해동사면도통’의 명칭을 취하며 백제와 신라의 대등한 관계를 설정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왕건은 고려 건국 후 후백제, 신라와 모두 화친을 맺었으나 920년 대야성, 진례성 공격으로 견훤과 틈이 생겼고, 인질 교환으로 성립시킨 화친 또한 오래 가지 못했다. 고려와 신라가 밀착하자 견훤은 927년 신라 왕경을 침입해 경애왕을 제거하였는데, 그 과정이 매우 잔인하고 가차 없었음에도 이후 견훤이 왕건에게 보낸 서한에는 尊位의 표현을 담았다. 이 서한은 그동안 견훤이 신라 왕실에 대해 신하의 입장을 취했다는 대표적 사례로 언급되어 왔으나, 오히려 후백제와 신라의 동류의식, 再造의 시혜적 태도, 견훤의 의로운 성정 등이 드러나며 왕건이 견훤에게 보낸 서한에 비해 신라에 대한 존중 의식이 현저히 떨어진다. 아울러 ‘돈독한 존왕의 의’라는 문구는 신라가 아니라 오월에 대한 표현으로 해석할 여지가 보인다. 사실 이미 신라왕을 죽음에 이르게 한 상황에서 운운한 존위 언급을 들어 견훤이 신라에 대해 군신 관계의 태도를 표방했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여겨지며, 견훤이 경순왕을 옹립한 것 즉 신라를 망하게 하지 않은 것은 당시의 고려 대치 상황과 최소한의 명분을 고려한 것이었을 뿐 군신 관계 인식에 의한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이와 같은 이해는 기존과 전혀 다른 새로운 관점이라고는 할 수 없으나, 근래 견훤의 신라 인식을 논하는 과정에서 ‘군신’이나 ‘존왕’의 의미가 과도하게 강조되는 경향이 있으므로 이를 되짚어 볼 필요가 있다고 판단된다.

목차

국문 초록
I. 머리말
II. 건국의 변과 ‘일통삼한’
III. 존왕의 의와 ‘군신 관계’
IV. 맺음말
참고문헌
Abstract

참고문헌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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