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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통음악학회 한국전통음악학 韓國傳統音樂學 제6호
발행연도
2005.5
수록면
241 - 274 (34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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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 “한일합방’ 이후 일제의 탄압이 날로 심해짐에 따라 항일투쟁의 중심지는 점차 중국에로 옮겨 오게 되었고 이에 따라 중국의 조선민족사회는 항일세력이 지배하던 항일구역과 항일투쟁을 저지하거나 탄압하던 세력이 지배하던 적점구(敵占區)로 양분되어있었다. 이는 이민시기 중국 조선족음악을 항일구역의 음악과 적점구의 음악으로 구분할 수 있게 하는 가장 중요한 원인이다.
본고는 적점구음악의 전개양상을 역사적 맥락 속에서 거시적으로 고찰하는데 주된 목적을 두었다. 고찰결과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1931년 9.18사변이전시기는 조선민족의 자율적 음악교육이 발전하던 시기이다. 이시기 조선족사립학교의 음악교재는 창가와 항일가요를 중심으로 편찬되었는데 이런 가요들은 대부분이 기존의 곡조에 새 가사를 부쳐서 만든 것이어서 성인곡과 아동곡의 구별이 거의 없었다. 조선족사립학교의 음악교재가 학생들의 년령적, 심리적 특성을 체현하는 방향에로 변화를 가지기 시작한 것은 1926년에 윤극영이 룡정에 와서 동요작품들을 창작, 보급해서부터이다.
2) 9.18사변이후 자율적인 음악교육의 발전은 급속히 저하되고 반대로 일제의 식민지노예교육이 기승을 부리게 되었다. 특히 ‘신학제’의 실시와 더불어 동요창작은 침묵기(沈默期)를 맞이하게 되었고 민족음악의 전수는 과외로 진행될 수밖에 없었다. 이시기 민족적 양심을 가진 음악교사들은 교내외 각종 공연에 민요와 애국, 애족의 내용이 담긴 노래들을 올렸고 심지어 프로그램을 작성함에 있어서도 수적으로는 적지만 실질적인 효과를 극대화시킴으로써 조선민족의 음악을 전반 음악회의 중심에 세우려고 노력하였다. 1936년에 성부가 구전하고 연주수준이 높은 하모니카합주단이 조직되었고 조선의 민간에서와 거의 같은 시기에 취주악이 발전 되였으며 1920년대 말에 이르기까지 취주악으로 항일가요를 연주하였다.
3) 악극단들의 순회공연과 레코드의 대량유통은 유행가를 보급시켰고 동시에 중국관련의 유행가창작을 활성화하였다.
4) 이민시기 연변의 천주교와 기독교계통에는 합창단과 악단이 있었으며 독일에서 이미 명성을 날린 우에루 부라므비루스를 비롯하여 많은 연주가들이 있었다.
5) 1920년대로부터 중국조선족은 음악단체를 세우기 시작하였으며 조두남은 1943년에 목단강에서 악단을 조직하여 동만총성추계민족예술절을 들썩하게 하였고 허세록은 연변에서 간도방송국 전속 경음악단을 세웠다.
6) 1930년대 중반에 신동 백고산이 독주음악회를 열었고 1940년대 상반기에 중국 3대 교향악단에 속하는 할빈교향악단과 신경교향악단에 조선민족음악가들이 대거 입단함으로써 전문연주가들의 음악활동이 상승세를 이루었다.
7) 태평양전쟁이 극심하던 1944년 봄에 조두남은 녕안극장에서 신작발표음악회를 가지고 1943년에 창작한 것으로 추정되는 명가곡 〈선구자〉를 발표하였다. 이 무렵 연길에서는 윤용하가 신작발표회를 가지고 가곡작품들을 발표하였고 허세록은 가요 〈영루〉와 〈향수〉를 발표하였다.

목차

[국문초록]
Ⅰ. 들어가는 말
Ⅱ. 적점구의 학교음악
Ⅲ. 적점구의 사회음악
Ⅳ. 나오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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