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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미술사학회 미술사학연구(구 고고미술) 美術史學硏究 第245號
발행연도
2005.3
수록면
5 - 37 (33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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漢 武帝는 치열한 전투 끝에 衛滿朝鮮을 멸하고, B.C. 107년에 樂浪ㆍ玄?ㆍ臨屯ㆍ眞番의 한사군을 설치하였다. 樂浪은 고구려와 백제에 의해 멸망될 때까지 漢과 魏晉 등 여러 왕조를 거치며 420여 년간 존속하였다. 낙랑은 한에 의해 설치되었지만 중국 사회라고 할 수 없고, 또한 고조선이 멸망하고 그 자리에 생성되었지만 고조선의 연결선상에서만 조명할 수 없다. 이 글에서는 오랜 기간 한반도에 위치하였던 낙랑이라는 독특한 지역사회의 성격을 사회상이 반영된 장신구를 통하여 조명하였다.
특히 낙랑의 장신구에서 주목되는 점은 인접한 곳이 아닌 먼 거리에 떨어진 지역에서 유래한 외래계 장신구들의 존재이다. 외래계 장신구의 수용과정의 분석은 낙랑의 특수한 성격과 사회적 기반을 이해하는 한 방법이라고 판단된다. 이에 외래계 장신구 중에서도 특히 낙랑과 인접하지 않은 지역에 그 근원이 있는 獅子形 垂飾의 계보와 수용과정을 중점적으로 분석하였다.
사자형 수식은 남녀 합장묘인 貞柏洞 3호분과 貞柏洞 37호분에서 모두 여성의 장신구로 출토 되었다. 한편 남성 묘주의 신분과 관계된 북방식 은제타출동물문 대구가 사자형 수식과 함께 동반된 점은 이들 장신구를 패용한 낙랑인들의 사회적 성격을 반영한다. 은제타출동물문 대구는 정백동 37호분을 비롯하여 정백동 2호분, 정백동 92호분, 석암리 219호분에서도 출토되었다. 정백동 2호분의 묘주는 夫租縣長을 지낸 사람인데, 前漢의 엄격하게 지켜졌던 歸葬制와 고조선계의 細形 銅劍이나 乙字形車馬具를 참고하면 토착인으로서 한의 관리에 임명된 것으로 이해된다. 또한 雲南 晉寧 石寨山 7號墓의 동물문 대구와 비교 검토한 결과 동물문 대구는 한의 왕실공방에서 제작하여 새로이 편입된 이민족에게 준 선물로 이해되었다. 따라서 사자형 수식의 패용자는 고조선 문화에 익숙하면서도 한과 좋은 관계를 가진 토착민의 부인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이와 같이 은제타출동물문 대구는 한과의 행정수급에서 수용된 장신구인 반면, 사자형 수식은 행정수급에 의한 것이 아닌 점은 낙랑사회의 특수성을 밝힐 수 있는 중요한 단서가 되었다. 사자형 수식은 북방이나 중원에서는 그 예를 찾을 수 없는 지역적 특징이 있는 장신구이다. 본래 인도에 그 祖形이 있는 사자형 수식은 현재 廣東省과 江蘇省의 중국 남방에서만 발견되는 장신구로 검이나 도끼 등과 명기형 수식과 함께 구성되기도 하며, 액을 막아주는 護符로서 패용되었다. 사자형 수식이 남방의 한정된 지역성을 보이는 양상은 당시 중국과 서방 간에 이루어진 바닷길 무역과 관련된 것 이다. 즉 인도와 동남아시아 그리고 중국 남방지역의 사자형 수식의 분포를 고찰한 결과 바닷길을 통해 이루어졌던 거점식 무역의 영향인 것이 究明되었다.
다음으로 중국 남방에서 낙랑까지의 경유지로 山東이 주목되었다. 이는 사자형 수식과 함께 서방계 외래요소를 보이는 페르시아 양식의 銀器가 廣東과 山東의 동남연안을 거쳐 낙랑을 잇는 통로로 출토된 고고학적 분포와 관련이 있다. 중간 거점지로서 산동의 역할과 관련하여 흥미 있는 것은 상인들의 활동이 조명된 점이다. 정백리 127호분에서 출토된 산동산 방격규구사신경이 담긴 남중국산의 漆?은 산동의 상인이 낙랑의 취향에 맞추어 화장도구를 세트화한 것으로 이해하였다. 산동은 춘추전국시대부터 고조선 상인들도 활동한 지역이었다 산동에 위치한 한대 武梁祠의 화상석에 단군신화와 관계된 장면이 표현된 것도 이미 산동에 고조선문화가 알려졌기 때문일 것이다.
중국 상인뿐 아니라 삼한 및 일본의 상인들도 활발하게 활동을 한 낙랑은 국내외적으로 물산의 집산지가 되었다. 낙랑에서 활동한 상인들의 존재는 지금까지 이해되었던 것처럼 낙랑문화가 漢郡縣으로서 일방적으로 중국문화를 수용하여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낙랑이 설치되기 전부터 토착 지역의 전통과 취향 속에 다양한 국제문화를 섭렵할 수 있었던 사회적 배경을 의미한다.

목차

Ⅰ. 머리말
Ⅱ. 樂浪 貞栢洞 3호분과 37호분의 구조와 성격
Ⅲ. 樂浪 貞柏洞 3호분과 37호분의 獅子形 垂飾 수식의 계보
Ⅳ. 樂浪의 남방계 공예품의 수용과 거점식 교역체계
Ⅴ. 맺음말
국문요약
ABSTRA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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