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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저널정보
한국고대사학회 한국고대사연구 한국고대사연구 50
발행연도
2008.6
수록면
103 - 131 (29page)

이용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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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란왕 야율아보기는 서기 925년 12월 16일 발해를 치겠다고 천명하였다. 그리고 12월 21일 군사를 본격적으로 움직였으며, 12월 29일 발해의 최전방 요충인 부여성을 에워쌌다. 부여성은 3일만에 함락되었다. 그로부터 6일 뒤인 서기 926년 1월 9일에는 발해의 수도 상경성이 포위되었다. 부여성에서 출발해 6일만에 무려 400km이상을 달려 발해 수도를 포위하고 항복을 종용할 정도로 거란 군대는 거침없었다. 포위한지 3일 뒤인 서기 926년 1월 12일, 마침내 발해왕 대인선이 항복을 선언했다.
강적 거란의 급습을 받고 발해가 무기력하게 무너진 이유는 무엇일까? 기강해이로 인한 방어체계 와해가 눈에 띈다. 국경을 침입한 거란의 선발대가 상경성까지 6일만에 주파할 정도로 발해의 산성들과 군사방어망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 비록 한차례 발해의 老相이 이끈 3만 대군이 거란군의 길목을 막아섰지만 시늉에 불과하였다. 노상은 나중에 거란의 괴뢰정부인 東丹國의 右大相에 임명되었다. 기강해이의 이면에는 문약해진 사회분위기와 사치스런 풍조가 작용하였을 것이다.
발해 멸망에는 내분도 작용하였다. 발해의 고위관료 상당수가 고려로 망명한 직후 거란이 침입하였으며, 별다른 전투 없이 거의 즉각적으로 항복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치열한 내분으로 발해는 점차 예전의 유연한 실리외교 전략을 상실하고 바야흐로 급변하던 10세기초엽의 국제정세에 발맞추지 못하였다. 강적인 거란과의 정면대결이라는 경직된 외교노선은 그만한 힘과 정확한 정세분석을 바탕으로 한 것이 아니기에 허장성세에 불과했다.

목차

국문초록
Ⅰ. 머리말
Ⅱ. 발해의 멸망과정
Ⅲ. 발해의 멸망원인
Ⅳ. 맺음말
참고문헌
Abstract

참고문헌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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