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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학교 한국사연구소 International Journal of Korean History International Journal of Korean History Vol.15
발행연도
2010.2
수록면
29 - 63 (35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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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주로 조선 경내에 파견되었던 것으로 알려져 왔던 경차관은 왜 조선의 경내(境內)를 벗어난 지역에까지 파견된 것일까? 왜 경차관 파견과 같은 조선-야인(여진), 조선-대마도 관계의 수직적 질서가 제대로 연구되지 못했던 것일까? 그럼 여진이나 대마도에 대한 경차관 파견은 조선의 자기중심적인 지역질서 인식과 어떠한 관련이 있는 것일까? 필자의 문제의식은 이러한 세 가지의 의문에서 출발한다.
사실 조건은 이성계의 여진 및 대마도에 대한 승리를 역사편찬을 통해 유교적 명분론으로 분식(粉飾)하여, 조선을 이들의 상국(上國)으로서 공식화하는 작업을 진행시켰고, 마치 명(明)이 조선을 번국(藩國)으로 규정한 것처럼, 사실상 이들을 조선의 번리ㆍ번병(藩籬ㆍ藩屛)으로 규정하였다. 이에 따라, 명(明)이 그 번병(藩屛)인 조선에 파견하는 ‘흠차관(欽差官)’을 차용(借用)하여, 여진족과 대마도에 조선에 대한 ‘사대(事大)’를 종용하려 파견한 것이 ‘경차관(敬差官)’이었다.
이러한 현상이 제대로 연구되지 못했던 것은 바로 한국의 한국사학계나 동양사학계, 그리고 서구학계에서 여전히 사용되고 있는 “교린”이라는 틀 때문이다. 15세기 조선-여진 그리고 조선-대마도 관계의 수직적 질서의 본질이 제대로 연구되지 못하고, “교린”의 틀을 통해 그 관계가 수평적이고 호혜적이었다고 이해해 왓던 배경에는 다음과 같은 딜레마가 있었다.
먼저 한국의 한국사학계나 동양사학계가 중국 중심적인 ‘사대(事大)’와 민족주의적인 관점 모두를 극복할 수 있는 탈중심적 관점을 마련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민족주의적 입장에서도 조선이 명(明)을 ‘사대(事大)’하였다는 관점을 극복하지 못하자, 중화(中華)의 인신(人臣)으로 다른 세력과 사사로이 교류할 수 없다는 “인신무외교(人臣無外交)”의 원칙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 밖에 없고, 결국 조선이 여진(女眞)과 대마도(對馬島)를 적극적으로 경략하려 했던 의도의 본질을 정확하게 설명하지 못했다. 다음으로 한국 사학의 뿌리 깊은 피해의식이 작용했다. 진화론적 관점에서 한국사학은 조선을 근대에 가까워진 ‘근세(近世)’로 규정하고 그 시작을 세종(世宗)을 앞세워 유례없는 문화적 과학적 발전의 시기로 묘사하였기 때문에, ‘근세(近世)’의 끝에 기다리고 있는 근대화의 실패에 대해서는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근대화 실패의 원인으로 늘 일본제국주의의 침략을 강조해왔다. 이렇게 한국사학이 늘 ‘피해자’의 입자을 강조했기 때문에, 근대와 직접 연결되는 ‘근세(近世)’라는 15세기에, 조선이 여진(女眞)과 대마도(對馬島)에 취한 폭력의 본질을 인정하기가 껄끄러워지는 딜레마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결국 “교린”은 이러한 딜레마를 은폐하는 틀이었다. 한국의 역사학계는 “교린”이라는 선량해 보이는 틀로 조선이 여진과 대마도와 맺은 관계가 수평적이고 호혜적인 것이었던 것처럼 설명하는 한편, 그 속에서 매우 교묘하게 조선이 이들을 군사적으로 공격한 것은 ‘침략’이 아닌 정당방위의 응징일 뿐이었고, 또한 조선의 문명, 문화, 과학기술이 여진과 대마도의 그것보다 진보한 것이었으며 이것이 결국 여진족과 대마도를 발전시키는 데 문화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사실상 매우 민족주의적인 논리를 펴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논리는 한국의 학계가 끊임없이 비판해 온 일본 제국주의의 조선침략에 대한 변명과 묘하게 닮은 꼴이었다.
그럼 제국주의의 자기중심적 시각에 입각해 “사대”를 강조하는 시각과 민족주의가 이를 전유하는 또 다른 자기중심적 인식인 “교린”이라는 틀을 벗어나, 즉 탈중심적으로 조선-여진 그리고 조선-대마도 관계를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그 단서는 경차관 파견을 중심으로 나타나는 명 중심의 동아시아 질서와 그 속에 위치하는 조선중심의 동북아시아 질서의 실제양상 속에 감춰져 있다.
즉 조선은 명(明)의 흠차관(欽差官)을 차용하였으면서도 이를 경차관으로 한 단계 낮추는 수사적(修辭的) 기교를 통해, 여진족과 대마도에 대한 우위를 확보하면서도 동시에 명(明)의 신하로 사사로이 다른 세력과 교류할 수 없다는 명(明) 중심의 질서를 거스르지 않는 영악함을 발휘하고 있었다. 결국 조선초기 여진과 대마도에 대한 번리ㆍ번병(藩籬ㆍ藩屛) 인식의 형성과 이에 기반한 경차관(敬差官) 파견의 관행은, 명(明) 중심의 동아시아질서를 강조하는 시각만으로 설명하기 어렵고, 또한 외세의 침략으로 인한 근대화 실패에 대한 피해의식으로 인해 조선의 여진과 대마도에 대한 침략을 인정하지 않는 “교린(交隣)”이라는 시각만으로도 역시 설명하기 어려운, 동아시아의 변방인 조선과 여진 및 대마도 사이에서 역동적으로 진행되던 탈중심의 관계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목차

Introduction
The Dispatches of Ky?ngch’agwan to the Jurchen Regions and Tsushima
“Kyorin (交隣)” as a Nationalist Frame in Modern Korean Historiography
Kory? and Chos?n’s Military Influence on Jurchens and Tsushima
Making Chos?n’s Own Tributaries
Between the Empire and the Vassal : Rhetorics of Ky?ngch’agwan
Conclusion
〈Abstra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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