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 내서재 .. 알림
소속 기관/학교 인증
인증하면 논문, 학술자료 등을  무료로 열람할 수 있어요.
한국대학교, 누리자동차, 시립도서관 등 나의 기관을 확인해보세요
(국내 대학 90% 이상 구독 중)
로그인 회원가입 고객센터 ENG
주제분류

추천
검색
질문

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曺秉漢 (서강대학교)
저널정보
서강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서강인문논총 西江人文論叢 第22輯
발행연도
2007.12
수록면
307 - 373 (67page)

이용수

표지
📌
연구주제
📖
연구배경
🔬
연구방법
🏆
연구결과
AI에게 요청하기
추천
검색
질문

초록· 키워드

오류제보하기
중국에 서구 근대문명 도입의 새벽을 연 淸末 초기 啓蒙사상가로 청일전쟁후 變法운동 시기의 嚴復과 변법 실패후 일본 망명지에서 20세기 초두에 계몽활동을 시작한 梁啓超를 들 수 있다. 대개 중국의 계몽운동을 대표하는 것으로 알려진 1910년대 후반 중화민국 초기의 5ㆍ4新文化운동은 필자의 입장에서는 좀 더 철저한 후기 계몽운동이라 할 수 있다. 본고의 범위는 변법운동 시기(1895~1898)에 『時務報』의 「變法通議」(l896) 발표로 시작해 淸朝 ‘政體개혁’을 모색한 양계초의 사상 전개, 1898년 말 일본 망명후 계몽활동 시기에 『淸議報』의 「自由書」(l899) 등에서 시작해 『新民叢報』의 「新民說」(1902)에 이르러 대체로 완결된 체계를 갖추게 된 근대 ‘국민국가론’의 형성과정과 성격, 이론적 구조를 추적하는 것이다.
변법 시기의 양계초는 康有爲 중심의 전투적 변법파 핵심집단의 이론가로서, 서구에서 시작된 세계 대세의 발전에 따라 정체 개혁의 이념적, 현실적 불가피성을 설득함으로써 일본과의 전쟁에서 파산한 洋務개혁의 수준을 넘어 변법파 핵심집단의 이데올로기와 정책을 공론화하는 역할에서 탁월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이 시기 양계초의 개혁사상은 스승 강유위의 今文經學[『春秋』公羊學]에 기초한 孔敎[改新유교]와 유토피아 大同세계 및 3世進化說로 구성된 준종교적 이상주의 개혁이념을 기초로 발전된 것이었다. 그는 근대적 학교 개혁을 통한 국민교육과 法治적 官制 개혁, 지방의회 중심의 지방자치를 구국의 개혁방안으로 제시했다. 君權을 넘어선 개혁의 사회 적 주체로서 紳士層의 단체결합[合群]과 그들의 紳權으로 대표되는 民權 관념, 民智의 증진을 통한 新民의 조성이라는 관념을 제기한 적이 있다.
변법 시기에 배태된 이 같은 관념이 일본 망명후 수년 간 더욱 철저한 서구 근대문명의 도입을 추구하는 계봉사상으로 전환하는 데는 1900년 義和團 동란을 계기로 淸朝 정부의 괴뢰화 및 세계열강의 공동관리하에 중국 半식민지화의 완성, 메이지[明治] 일본의 학계를 통한 신문명의 충격이라는 역사적 배경이 있었다. 일본을 통해 섭취한 서구의 신학문ㆍ신사상을 소개할 뿐 아니라 民智로부터 확장해 자유ㆍ민권과 아울러 民德 영역에서 ‘公德’ 내지 국민도덕의 형성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이 같은 사상적 전변은 양계초가 엄복의 계몽사상과 접근하면서 더욱 포괄적, 정치적인 계몽이론을 체계화하는 과정으로서, 강유위의 공교주의, 공양학적 대동 세계주의와 도식적 역사 단계설을 포기하고 이상주의ㆍ세계주의로부터 현실적 민족주의로 전환하는 것이기도 했다. 사상ㆍ언론의 자유를 중심으로 한 양계초의 자유관은 결국 국내의 정치적 권리[민권]와 대외적 국가주권[국권]이라는 집단적, 정치적 권리로 수렴되었으며, 따라서 개인적 자유와 인권은 더 이상 추구되지 않았다.
인민의 집적이 국가이므로 민권은 국권의 구성요소로서 양자 사이의 대립적 모순관계는 상정되지 않았다. 그것은 민권 신장의 방편이 될 수도 있으나 한편으로 민권이 국권의 종속 변수로 국민국가 형성을 위해 동원되는 전략적 가치로만 인식되기 쉬웠다. 더욱이 君權ㆍ官權의 억제를 통해 확보할 부분적 민권의 전면적 완성으로서 민주 이념은 이상으로서 먼 미래로 보류되었을 뿐이다. 국민국가의 형성에 필수적인 요소는 민권 이외에 공덕, 즉 국민도덕이었다. 민권은 국민과 군주ㆍ관료사이에 각자 권한의 법률적 한정을 통해 성립되므로 법치를 보장하는 立憲制 정체의 확립이 필요하며, 단지 군주의 유무로 구별되는 입헌군주정과 입헌공화정의 차이는 양계초의 생각에 그다지 의미가 없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민권과 공덕ㆍ법치ㆍ지방자치 등에 기초한 양계초의 국민국가론과 민족주의론은 민권과 국권 사이의 균형을 모색하는 계몽주의적 합리성의 측면이 있었다. 민권과 법치를 통한 근대국가 건설이 국민의 지방자치 역량에 의존한다는 주장은 그가 반대한 공화정의 사회적 토대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개인의 자유ㆍ인권 관념이 결여된 국민의 집단적 민권 관념은 국가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의 인민의 집단적 평등권만 중시될 위험성이 있다. 그가 天皇制 관료독재국가인 일본형 입헌군주제를 영국형의 입헌군주제와 마찬가지로 찬양한 것도 그 결함의 표현이다.
국민국가의 주권 평등을 옹호하는 방어적 민족주의를 제시한 양계초가 민족주의에 기초한 서구 제국주의를 민족주의 발전의 필연적 단계로서 ‘민족제국주의’라 규정한 것은 이 시대 사회진화론이나 경쟁적 문명론을 수용한 결과로서 그의 근대 국민국가론 자체의 한계였다. 또한 양계초의 합리적 국민국가론이 전근대적 種族주의와 결합한 사실도 주목된다. 그는 역사란 인종의 발달과 그 경쟁을 서술한 것이고 세계가 진보할수록 종족 이론도 더욱 발달한다고 했다. 동아시아에서 근대 민족주의의 형성은 국민국가론이 전근대적 종족주의와 결합함으로써 가능했던 것이다.

목차

〈국문초록〉
1. 머리말
2. 變法 시기 梁啓超의 근대국가 모색
3. 啓蒙시기 民權論과 法治사상
4. 梁啓超의 국민국가론과 민족주의
5. 맺음말
〈Abstract〉

참고문헌 (0)

참고문헌 신청

함께 읽어보면 좋을 논문

논문 유사도에 따라 DBpia 가 추천하는 논문입니다. 함께 보면 좋을 연관 논문을 확인해보세요!

이 논문의 저자 정보

이 논문과 함께 이용한 논문

최근 본 자료

전체보기

댓글(0)

0

UCI(KEPA) : I410-ECN-0101-2010-001-00219346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