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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이미숙 (강릉원주대학교)
저널정보
강원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인문과학연구 인문과학연구 제26집
발행연도
2010.9
수록면
227 - 248 (22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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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ㆍ정유재란(1592년~1598)은 일명 陶磁器戰爭이라고 일컬어지기도 하는 데 이 기간 동안 일본 다이묘(大名)들에 의해 끌려간 조선의 沙器匠들에 의하여 日本 磁器의 역사가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조선의 도자기 기술자들이 일본으로 끌려가던 16세기 조선의 도자기 기술은 일본을 앞서 있었다. 그 당시 일본의 도자기 제작기술은 陶器 수준에 머물러 있는 반면 조선은 磁器를 생산할 수 있는 나라였다. 李參平은 이때 일본으로 끌려간 수많은 조선의 사기장 중에서 가장 잘 알려진 인물이다. 이삼평의 일본 도래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많은 설들이 전해진다. 이삼평과 관련된 사료들은 1654년에 이삼평 자신이 직접 작성하여 多久家에 제출한 문서의 사본인 『가쿠(覺)』를 비롯하여『乍恐某先祖之由緖以御訴訟申上口上覺』ㆍ『口達覺』ㆍ『金ケ江三兵衛由緖之事』ㆍ『丹邱邑誌』등이 있으며 이상의 기록들을 기초로 하여 그 이후에 나온 『金ヶ江三兵衛由緖書』ㆍ『有田町史』 등의 사료들은 위의 내용들을 답습 하고 있다. 위의 사료에 나와 있는 기록들을 종합하여 정리하면 조선이름이 李參平인 가나가에 산페이(金江ケ參兵衛)는 출신지가 忠淸南道 鷄龍山의 錦江부근으로 아리따의 영주인 나베시마 나오시게(鎬島直茂)에게 잡혀 1598년 일본으로 건너갔으며 그의 나이 38세때인 1616년에 아리따(有田)의 이즈미야마(泉山)에서 백토를 발견하였다. 또한 도자기 가마의 구조를 변경하여 높은 온도의 자기를 구워낼 수 있는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하였다. 일본에서 자기의 생산이 가능하게 되는 시점인 1640년대의 왕조교체에 따른 중국의 내란은 일본 아리따 도자기의 생산과 발전에 큰 호기를 가져왔다. 따라서 조선의 영향을 받았던 아리따 도자기는 1640년대에 이르면 빠르게 중국화 되어간다. 그러나 磁器를 만들 수 있는 원료인 백토광산의 발견이나, 고온소성기술은 영향을 준 기간의 길고 짧음에 상관없이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가지며 그러한 까닭으로 임진왜란 때 끌려간 조선의 사기장들이 400여년의 세월이 지난 오늘날 까지도 일본 도자기의 陶祖로 칭송받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따라서 영향을 받은 기간이 50여년의 기간이라고 해도 그 기간 동안의 조선 사기장에 의해 전파된 조선 도자기 제작 기술과 그들의 업적은 일본 陶藝史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고 할 수 있다.

목차

〈국문초록〉
1. 들어가는 말
2. 李參平의 피납과정 및 배경
3. 이삼평 피납 후 아리따도자기(有田燒)의 발달
4. 맺음말
참고문헌
Abstra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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