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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신동규 (강원대학교)
저널정보
한일관계사학회 한일관계사연구 한일관계사연구 제27집
발행연도
2007.8
수록면
133 - 171 (39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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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에서의 주된 논점은 海東諸國紀에 수록된 일본의 國王觀, 그리고 일본에 國王이라는 용어가 외교적 측면으로 정착되면, 탄생한 日本國王使라는 사절단이 海東諸國紀가 편찬된 1471년을 전후해서 과연 어떠한 성격을 가지고 변화되고 있었는가라는 것인데, 이를 몇 가지 점에서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海東諸國紀에 수록된 일본의 國王이라는 용어와 국왕관에 대한 의미 부여로서 일본에서의 國王의 의미는 대외적 대내적인 양면성을 띠고 있었고, 이것은 일본의 외교적 양면성을 보여주는 하나의 사례라는 점이다. 대외적인 면에서 國王(=日本國王)을 내세워 동아시아 국제질서라는 틀 속에서 일본을 위치시키고, 대내적인(=국내적) 면에서 본다면, 天皇이라는 표면적 권위를 인정하며, 國王이라는 명칭 대신에 征夷大將軍=쇼군이라는 武威를 내세워 국내 권력을 장악하고 있었다. 둘째, 조선 측의 입장에서 海東諸國紀의 國王觀을 본다면, 일본 ‘최고의 정치적 실력자’로서 미나모토씨(源氏)=征夷大將軍(將軍, 쇼군)=국왕이었다. 이러한 인식은 海東諸國紀가 편찬된 1471년을 전후한 중세 이후 조일관계 속에 일본의 정치권력 주체를 규정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시사하는 의미가 크다. 셋째, 일본에서는 외교적인 차원에서 國王이라는 용어가 정착이 되어, 일본국왕사라는 사절단을 조선에 파견하게 되는데, 이는 1471년 海東諸國紀 편찬을 전후하여 그 성격이 크게 변하고 있다는 점이다. 즉, 본문의 일본국왕사의 파견 목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海東諸國紀가 편찬된 1471년을 전후한 시기 일본국왕사의 목적은 왜구금압이 중요했으나, 이후부터는 무역액의 증가를 위해 일본국왕사의 명의를 사칭한 僞使가 급증하게 되었다. 여기에는 海東諸國紀에 의해서 정립된 일본국왕사에 대한 특권적인(諸巨酋使보다 실리적인 특권) 규정이 전제하고 있었으며, 결국, 이러한 특권은 사절 파견의 명의로서 일본국왕사의 가치를 높여주었고, 이것이 1470년 이후 일본국왕사 사칭의 僞使를 증가시키는 하나의 배경이 되었던 것이다. 넷째, 일본국왕사의 명의로 파견된 사절 중에 僞使들이 많다는 것을 조선 정부도 어느 정도 인지하고 있었으나, 이를 접대한 것은 조선의 大國觀에 의해 일본을 회유?기미하기 위한 정책의 발현이었다는 점이다. 더욱이 僞使였던 일본국왕사는 전술한 國王이라는 용어가 일본의 외교적 양면성을 설명해 주듯이, 일본국왕사 또한 표면적인 책봉국가 간에 공식적인 관계의 교린과 내면적으로 실리추구라는 양면성을 가지고 발생하였던 것이며, 이것이 일본국왕사의 또 하나의 성격으로 규정지을 수 있겠다.

목차

【국문초록】
1. 머리말
2. 海東諸國紀로 본 日本의 國王觀?幕府 외교의 양면성
3.『海東諸國紀』로 본 日本國王使의 성격
4. 맺음말
【ABSTRACT】

참고문헌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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