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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류한영 (시복시성주교특별위원회)
저널정보
광주가톨릭대학교 신학연구소 신학전망 신학전망 169호
발행연도
2010.6
수록면
115 - 140 (26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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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 ‘주문모 신부 선교 200주년 기념 학술 심포지엄’에서 주문모 신부가 활동하던 당시의 정치적 배경과 그의 선교 활동이 연구되었다. 1997년 이후 2008년까지 한국 천주교회의 초기 순교자들에 대한 자료집이 정리되면서 주 신부에 대한 새로운 연구가 가능하게 되었다. 앞선 연구들이 주로 역사적 관점에서 이루어졌다면, 본 연구는 신학적 관점에 더 초점이 맞추어져 진행되었다. 주문모 신부의 사제상이 현대를 살아가는 사제들의 모습을 비추어주는 관점에 따라 기술된 것이다.
1752년 중국 강남의 소주부 곤산현에서 태어난 주문모 야고보 신부는 과거를 공부하다가 인생과 신앙의 진리를 깊이 느끼고 성소를 얻어 북경교구 신학교에 입학하였다. 제1회 졸업생으로 사제 서품을 받은 주 신부는 구베아 주교의 눈에 들어 조선 선교사로 발탁되었다. 그가 조선 사람과 외모가 비슷하며 신앙과 학덕이 깊었기 때문이었다.
한국 천주교회의 초기 평신도 지도자들은 가성직제도를 1786년에 시행하다가 그것의 부당함을 1787년에 인지한다. 이후 북경 교회에 밀사를 파견하고 성직자 영입을 준비하며 노력한 결과, 1794년 말 주문모 신부가 입국에 성공하였다. 1795년 부활절에 주문모 신부는 한국에서 본격적인 사목 활동을 시작하였다. 이후 서울에서 일어난 을묘박해(1795)를 시작으로 거의 매년 지방에서 박해가 일어나 신유박해(1801)까지 그의 사목 방문 활동은 제한적이었다. 그러나 주 신부는 교회 공동체를 조직하고 평신도 지도자들을 양성하여 신자들을 두 배로 성장하게 하였다. 그는 봉헌 생활을 하려는 신자들을 배려하여 유 요한과 이 루갈다를 동정 부부로 맺어 주었다. 주 신부는 한국에서 종교의 자유를 얻기 위한 방안, 곧 서양의 큰 배를 불러오는 방안을 북경 주교에게 제시하였다. 그는 1796년부터 1800년까지 매년 북경 주교에게 편지를 보내 사목 활동을 보고하였다.
19세기 초엽의 한국 신자들은 1801년에 양떼와 함께 순교한 주문모 신부를 매우 존경하였다. 그들은 주 신부를 직무에 충실하고 박해의 상황에서 최선을 다하여 전교한 사제로 기억한다. 이러한 주 신부의 삶과 활동은 한국 천주교회 사제상의 원류가 되었으며 ‘사제의 해’를 맞이하여 지금 여기에서 살아가는 사제들의 귀감이 된다.

목차

국문 초록
I. 들어가는 말
II. 성직자 영입 운동과 주문모 신부의 입국
III. 첫 선교사 주문모 신부의 삶과 활동
IV. 나가는 말
Abstract

참고문헌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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