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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박재락 (영남대학교)
저널정보
한국국학진흥원 국학연구 국학연구 제20집
발행연도
2012.6
수록면
335 - 370 (36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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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은 ‘구천십장’ 설화에 나타나고 있는 격암 남사고에 대해서 효도관에 따른 풍수와의 상관관계를 재조명하고자 제시해 본 글이다. 주지하다시피 격암은 1509~1571년의 시기에 조선시대의 한 벽촌이었던 蔚珍에서 우거하면서 평생을 선비의 신분으로 살았던 재야학자였다. 『격암선생일고』에 나타난 수제자 남세영의 증인으로 보면 격암은 평생 『소학』 공부를 열심히 하였고, 경세의 뜻을 펴기 위해 과거시험도 보았으나 끝내 과거 시험에 합격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묵묵히 유학에 몰두했던 그의 학덕을 주면에서 앙모仰慕하여 ‘효렴孝廉’으로 천거했던 것이 직접적 계기가 되어 ‘사직참봉社稷參奉’ 과 ‘관상감교수觀象監敎授’의 벼슬을 역임할 수 있었다.
관상감교수로 재직하면서 격암은 주로 왕조의 운명과 연관되는 예언을 적지 않게 남겼고, 가끔 주위 사람들의 운명을 예언하기도 했다. 그러나 ‘구천십장九遷十葬’ 으로 각색된 격암의 설화를 보면, 격암이 부친을 이장하면서 묘혈을 제대로 잡지 못하여 아홉 번이나 이장했다는 것이다. ‘구천십장’설화에서 중요한 것은 격암이 묘터를 잘 못 잡았다는 것이 아니나 아홉 번이나 이장을 할 정도로 부친에 대한 효심이 있었다는 점이라고 본다. ‘구천십장’ 설화가 팔도의 백성들에게 널리 전파될 만큼 격암은 대중의 사랑을 받았던 풍수사상가였던 것은 분명하다고 본다. 이에 격암의 진면목이 구천십장 설화에서 다소 왜곡되어 있다고 느낀 필자는 격암의 풍수안목을 검증하고자 실제 부친 묘가 있는 선영을 답사하였다. 격암의 부친 남희백 공의 묘소를 답사하고 과연 이곳이 구천십장 설화에서 말하는, 즉 풍수리지상의 흉지凶地에 해당되는지를 검증해 보았다. 풍수지리학의 분석틀인 간룡ㆍ장풍ㆍ득수ㆍ정혈ㆍ좌향법으로 검증해 본 결과, 이곳 선영은 주변의 산세가 혈장을 보호할 수 있는 장풍형국을 이루고 있으며, 백두대간 내룡맥의 생기가 머물고 있는 명당공간인 것으로 확인되었다. 이러한 국세에 소점한 것으로 볼 때, 격암의 풍수안목은 결코 낮지 않다는 것이 필자의 판단이다.
따라서 이러한 ‘구천십장’의 설화나 전설은 다소 왜곡이 있다고 본다. 이러한 격암의 풍수적 안목을 필자의 풍수적 분석에 따라 명당길지였다고 밝힌 것은 ‘구천십장’설화에 나타난 형국론에 대하여 격암의 효심을 풍수지리적 측면에서 비추어 반증하고자 하는 이유에 있다. 앞으로 이 분야에 대한 연구에 있어서 기존의 연구를 보완ㄴ할 수 있는 역사자료와 문헌증거의 보강 등이 이루어져 격암 남사고의 ‘구천십장’ 설화 인식이 새롭게 조명될 수 있는 작은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목차

요약문
1. 서론
2. 문헌 속에 나타난 남사고의 고찰
3. ‘구천십장‘ 설화의 재조명
4. 부친 선영先塋의 풍수적 분석
5. 결론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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