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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황보경 (세종대학교)
저널정보
고려사학회 한국사학보 韓國史學報 제58호
발행연도
2015.2
수록면
33 - 64 (32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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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603년 고구려가 신라의 북한산성을 공격하게 된 당시의 정세와 배경을 살펴보고, 전투의 양상과 그 의미에 대하여 고찰해 보고자 마련하였다.
고구려가 공격한 북한산성은 지금의 서울 아차산성으로 비정되고 있으며, 지표와 시굴조사를 통해 ‘北漢’명 기와 등이 출토된 바 있다. 이 전투는 고구려가 551년 신라와 백제에게 빼앗긴 한강 유역을 되찾기 위한 목적도 있었지만, 그보다 신라의 북상을 막기 위해 先攻한 사례라 볼 수 있다. 한편으로는 신라가 지속적으로 수와의 외교관계를 밀착시켜 가는 것에 대한 견제를 하고자 했던 것이다. 따라서, 603년 북한산성 전투는 북한산성을 점령하여 영유화하기 보다는 신라의 북상을 차단하고 수와의 밀착외교를 저지하려는데 더 큰 목적이 있었다고 본다.
이에 반해 신라는 진평왕의 왕권이 강화되는 과정에서 진흥왕대 넓혔던 영역의 유지와 고구려와의 대결에서 주도권을 잡기 위한 포석이 있었다. 특히 진평왕의 출전이 갖는 의미는 진흥왕이 확장한 영토에 대한 사수의지가 확고했고, 젊은 화랑과 낭도들을 내세워 향후 정국의 안정화를 기하고, 충성심을 이끌어내기 위한 목적도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북한산성 전투에서 그친게 아니라 고구려군을 따라 철원까지 추격하여 고석정에 비석을 남겼을 가능성이 있으며, 604년 남천에 있던 주치소를 다시 북한산으로 옮겨오게 된 계기를 만들었다. 이는 진평왕이 진흥왕의 치적과 거의 비슷한 행보를 보인 것으로 진흥왕 이후 대고구려에 대한 수세적인 모습에서 공세적으로 정책을 전환하고자 했던 의도로 볼 수 있겠다.
603년 북한산성 전투는 고구려와 신라군이 격돌한 전투로 두 나라 사이에 벌어진 일회성에 그친 전투로 여길 수 있지만, 당시의 정세로 보아 고구려와 신라뿐만 아니라 백제, 수의 외교관계가 복잡하게 얽힌 가운데 벌어진 전투였다. 그리고 고구려는 신라의 거점성을 공격함으로써 실질적인 지배를 저지하고, 수와의 외교관계를 차단하기 위한 목적이 있었으며, 신라는 진흥왕이 확보한 영역의 사수와 젊은 화랑과 낭도들을 활용하여 왕권강화의 기회로 삼았던 전투였다고 사료된다.

목차

국문초록
1. 머리말
2. 603년 이전의 정세
3. 북한산성 전투 양상과 의미
4. 맺음말
참고문헌

참고문헌 (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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