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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권영오 (대저중학교)
저널정보
한국고대사학회 한국고대사연구 한국고대사연구 82집
발행연도
2016.6
수록면
313 - 349 (37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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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녕 2년(895년)에 새겨진 해인사 탑지는 모두 4매 6면에 889년에서 895년 사이의 일을 기록하였다. 그중 海印寺 護國三寶 戰亡緇素玉字는 7년간 초적들의 습격에 희생된 56명의 승속인 명단이다. 연이은 흉년에 생존차원에서 봉기한 농민들이 산발적으로 해인사와 주변 사찰, 그리고 사원전을 습격하였지만, 해인사의 존립을 위협할 정도는 아니었다.
920년까지 해인사 주변의 군사적 요충지인 대야성이 건재하였고, 거창성과 강주도 신라의 통제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혼란한 전국을 떠돌던 최치원은 난리를 피해 해인사로 들어왔고, 이후에도 절을 중창할 것을 합의한 것으로 보아 당시 해인사의 치안이 크게 불안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920년(경명왕 4년) 정월에 신라는 사신을 보내 고려와 우호관계를 맺음으로써 반란 세력인 고려를 국가로 인정하였고, 그해 2월에는 강주장군 윤웅이 고려에 항복하였다. 그리고 10월에는 후백제왕 견훤이 대야성을 함락시켰다.
이후 해인사와 그 주변 지역은 한 동안 고려와 후백제의 접전 지역이 되었다. 928년 이후 고려의 통일까지 해인사와 주변 지역은 후백제의 세력권으로 들어갔다.
신라의 붕괴가 가시화되면서 지방 세력의 이탈도 나타나기 시작하였지만, 해인사와 그 주변 지역은 다른 지역에 비해 상대적으로 늦게까지 신라의 세력권에 머물러 있었다. 신라 말의 지방 사회 모습을 일면적으로 고정시켜 볼 것이 아니라 지역적인 차별과 역사적 진행과정에 따른 변화 속에서 동태적이고 다면적인 접근이 필요하다고 하겠다.

목차

국문 초록
Ⅰ. 머리말
Ⅱ. 해인사 탑지에 나타난 해인사와 주변 지역 정세
Ⅲ. 해인사 탑지 작성 이후 해인사와 주변 지역 정세
Ⅳ. 맺음말
참고문헌
Abstract

참고문헌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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