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단의 연구자들은, 大明律講解(이하 ‘강해’혹은 ‘증보전 강해’로 약칭함)를, 적어도 世宗대 이후 구한국 시대까지 수백년에 걸쳐 조선의 재판실무에서 가장 보편적으로 활용된 ‘대명률 주석서’로 인식하고 있다. 이와 더불어 현재까지 강해의 최초의 편집자와 편집지는 ‘중국인․중국’이었을 것이라는 추정이 우세하였었다. 그런데 2015년에 다나카 도시미쓰(田中俊光)는‘강해의 편집자․편집지’는 ‘조선인․조선’이었을 것이라는 추정을 하고 있다. 이 추정이 사실이라면 강해는 중국계 율령에 대한 조선최초의 독자적 주석서가 되는 셈이고 강해의 실체에 대한 보다 본격적인 연구와 분석이 필요하게 된다. 필자는 이 글에서 강해가 과연 (1) ‘ 주석서’를 지향한 문헌이었는지, (2) 주석서로서의 독자성을 인정할 만한지, (3) 과연 ‘우수’하다고 말할 수 있는지, 세밀한 검증을 하려고 한다. 14~15세기의 중국에서 출현한 후 조선에 유입되어 이용된 대명률관련 주석서로는 律學解頤(이하 ‘해이’로 약칭함), 律解辯疑(이하 ‘변의’로 약칭함), 律條疏議(이하 ‘소의’로 약칭함)의 3종이 중요하다. 따라서 해이, 변의, 소의의 주석단편(註釋斷片)과 강해의 주석단편의 연관관계를 실증적으로 분석할 필요가 있다. 논증의 순서는 다음과 같다. 먼저 선행하는 3종의 주석서와 강해의 비교연구에 필요한 몇 가지 형식적인 지표들을 검토(Ⅱ) 한 후, 강해에 추가된 주석단편들을 변의의 그것과 양적․질적으로 비교(Ⅲ, Ⅵ)한 다음 成宗 9年(1478)의 李繼孫․李封의 食物求請 사건의 擬斷 논쟁과 添入 기사의 계기를 상세히 살펴 본(Ⅴ) 다음 증보강해의 존재와 증보내용을 증보전의 그것과 비교분석(Ⅵ)한 후 결론에서 강해의 위상을 재검토(Ⅶ)한다. 이 논문의 결론은 다음과 같다. 증보전 강해에 부착된 주석단편은 양적으로나 질적으로나 먼저 출현하였던 다른 3종의 문헌들(해이, 변의, 소의)의 그것 보다 대단히 疏略한 것이었다. 증보전 강해의 편집자와 편집지가 ‘중국인, 중국’이었든지 아니면 ‘조선인, 조선’이었든지와 상관 없이 증보전 강해에 주석서로서의 독자성이나 독창성을 부여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증보강해의 주석서적 성격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다만 증보강해도 거의 전부 다른 선행하는 주석서의 주석단편을 기계적으로 轉載한 수준이므로 주석의 독자성은 인정하기 어렵다. 증보전 강해가 조선말기까지 널리 보급되어 활용된 이유는 그것이 주석서로서 유용하기 때문이라기 보다는 대명률을 온전히 담고 있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증보전 강해’는 군데 군데 주석단편을 담고 있지만 그 주석단편들의 수는 최소한으로 억제된 것이고 ‘증보전 강해’의 주안점은 오히려 대명률본문에 있었다. 따라서 증보전 강해는 대명률주석서라는 관점에서 바라보기보다 널리 보급된‘보급판 대명률’로 바라보는 것이 더 적절하다. 이에 반하여 증보강해는 주석서로서의 기능이 더 강조된 문헌이지만 널리 이용된 것 같지 않다. 다음에 강해의 ‘편집자와 편집지’는 ‘중국인․중국’이었을까 아니면 ‘조선인․조선’이었을까? 첫째, 증보강해의 편집자와 편집지는 조선․조선인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증보강해의 출현은 성종실록의 첨입기사와 관련이 있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둘째, 증보전 강해의 편집자와 편집지는 조선․조선인이었을 가능성이 있지만 그렇다고 단언하기는 어렵다. 조선초기의 사료들은 ‘조선인들조차도 증보전 강해의 편집자와 편집지를 몰랐던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을 하게 만든다. 조선인들에게는 증보전 강해의 편집자와 편집지가 ‘중국․중국인이었을까 아니면 조선․조선인이었을까’ 하는 문제의식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Daemyeongryul-Ganghae(DaMing lü jiangjie, 大明律講解, hereinafter ‘KH’) had been most popularly studied, read and used official law code by Korean officials during the entire Choson Period(from late 14<SUP>th</SUP> century through late 19th century). However, when and by whom and how KH was written has been totally unknown. Until now mainstream Korean legal historiography has conjectured that KH probably must had been written by Ming Chinese in Ming China in about late 14<SUP>th</SUP> century or early 15<SUP>th</SUP> century, and considered it as a kind of commentary book of Great Ming Code (Daminglü, 大明律, hereinafter ‘GMC’). However, in the year of 2015, a young Japanese scholar offered a new perspective about KH. He conjectured that probably KH would have been written by Korean in early Choson Dynasty. In addition to that he also judged KH as a Korean version of ‘good’ commentary of GMC. In this essay I raised a question whether we can judge KH as a ‘good’ commentary of GMC, and if the answer is yes, what kind of commentary book it was. What I found in this essay are as follows. First, there were two kinds of KH. The one, which I call it as a ‘pre-enlarged early KH’, could be considered as a law code rather than a commentary book of GMC because of the low-quality of commentaries. On the other hand, the other, which I call it as a ‘later enlarged KH’, was a proper commentary book of GMC without any doubt. Second, the qualities of the commentaries of KH, whether it is ‘pre-enlarged early KH’or ‘later enlarged KH’, cannot be judged positively because of non-authenticity. All the commentaries of ‘early KH’and ‘later enlarged KH’were borrowed mechanically from other authentic imaginative commentary books of GMC such as Lüjie bianyi(律解辯疑) or Lǜxué jiě yí(律學解頤) or Lütiao shuyi(律條疏議) and et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