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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양정필 (제주대)
저널정보
한국사학회 사학연구 사학연구 제125호
발행연도
2017.3
수록면
229 - 269 (41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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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만덕(1739~1812)은 濟州의 妓女였다. 1796년 제주도에 대흉년이 들어 굶어주는 사람들이 있었다. 김만덕은 많은 쌀을 관청에 무상으로 제공하여 굶주린 이들을 도왔다. 제주 牧使는 이 사실은 조정에 보고하였다. 국왕 正祖는 김만덕의 소원을 들어주도록 하였다. 김만덕은 免賤되기를 원하지 않고 서울과 금강산을 구경하고 싶다고 했다. 정조는 그 소원은 받아들여서 김만덕은 서울은 물론 금강산까지 유람할 수 있었다. 김만덕이 서울에 와서 머물 때, 官人유학자들은 김만덕의 慈善을 칭송하는 글들을 지었다. 그것이 지금까지 남아 있어서 김만덕을 역사적 위인으로 만들고 있다.
최근 김만덕은 제주도를 대표하는 인물이 됨은 물론이고 전국적으로 유명한 인물이 되었다. 그녀의 자선 활동을 생각하면 이러한 평가는 정당한 것이다. 다만 역사적 인물이 될수록 그녀의 삶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더욱 요구된다. 김만덕의 자선 활동, 서울 및 금강산 나들이에 대해서는 기록이 있어서 논란이 거의 없다. 그러나 그녀가 어떻게 부자가 될 수 있었는가 하는 문제, 즉 경제활동에 대해서는 관련 기록이 거의 없어서 구체적인 실상을 확인하기 어렵다. 그런데 최근에 그녀가 20여 세에 免賤하여 양인이 되었고, 이후 상업활동을 통해 부를 쌓아 巨商이 되었다는 주장이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다.
본고에서는 이러한 이해가 당시의 시대적 조건과 부합하는 지를 살펴보았다. 당시 제주도의 상업발달 수준을 감안했을 때 그녀가 상업으로 큰 돈을 모았다는 기존의 주장은 재고의 여지가 많다. 당시 제주도와 본토를 왕래하는 船商들이 있었다. 그 선상들은 거의 대부분 제주도 출신이었다. 즉 제주도와 본토와의 교역은 제주 출신 상인들이 주도하였다. 간혹 본토 상인이 제주도를 찾아서 상업활동을 하였지만, 주된 경향이었다고 보기 어렵다. 그런데 최근에 김만덕을 巨商으로 이해하는 주장에서는 그녀가 본토에서 온 선상 혹은 상인들을 파트너로 삼아 상업에 종사하였다고 한다. 제주도를 찾아오는 본토 상인이 매우 적은 조건에서 이러한 상업 방식으로 거상이 된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떨어지는 것이다. 또 김만덕은 20여 세에 면천되었다는 주장이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러나 당시 官妓의 면천에는 막대한 경제적 부담이 있었다는 점, 관찬 사서에 김만덕이 기녀로 기록된 점 등으로 보아 그녀가 면천했다는 주장 역시 재고의 여지가 매우 많다.
그렇다면 김만덕은 어떻게 하여서 부자가 되었을까. 필자는 그녀가 기녀였다는 사실에 주목하였다. 조선후기에 크게 이름 난 기녀는 짧은 기간에 큰돈을 모을 수 있었다. 김만덕이 제주도 내에서 이름난 부자가 될 수 있었던 결정적 계기는 그녀의 기녀 활동이었다고 주장하고 싶다. 이러한 주장은 통설과는 많이 다르다. 비록 사료에 근거하지 못하고 당시의 시대적 조건을 감안한 주장이라는 한계가 있지만, 기존과는 다른 새로운 관점 제시로 김만덕 연구가 좀더 풍성해지는 데 조그마한 도움이라도 되기를 바란다.

목차

요약
머리말
Ⅰ. ‘김만덕 객주설’ 재검토
Ⅱ. 경제활동과 재산형성
맺음말
참고문헌
Abstract

참고문헌 (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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