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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전성현 (동아대학교)
저널정보
역사문화학회 지방사와 지방문화 지방사와 지방문화 제20권 제1호
발행연도
2017.5
수록면
161 - 192 (32page)
DOI
10.17068/lhc.2017.05.20.1.1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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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량왜관시기부터 존재했던 용두산신사는 식민지시기 ‘지역(부산)과 국가(일본)’의 신사라는 신사 본연의 역할을 수행하기 위한 각종 상징적 의례를 집행했다. 이들 의례는 부산의 우지가미(氏神)를 중심으로 하는 일본인들의 토착성(異化)과 천황을 정점으로 하는 신민화(同化)의 이중 장치였다. 그 중심은 例祭였다.
예제는 1908년부터 시작하여 식민지 내내 집행되었다. 애초 예제는 우지가미제(氏神祭) 였는데, 1936년 國幣小社 승격으로 말미암아 主神의 변동이 생겨 이후 예제 기간 중 별도의 우지가미제로 실시되었다. 즉, 예제는 끝까지 지역 일본인들의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한 의례였던 것이다. 이와 같은 성격을 보다 잘 드러내 주는 것이 神幸 행사였다.
신행은 종교사회적 의미에서 기복과 정화 의식인 동시에 신역으로서의 지역의 공간적 정체성을 구현하는 중요한 장치였다. 이는 신행구간을 통해서도 잘 드러나는데, 신행구간은 행정구역의 확장에도 불구하고 최초 거류민단의 영역을 넘어서지 못하고 오히려 축소되었다. 더군다나 지역의 경계를 상징하는 장소로서의 御旅所도 신사를 중심으로 하는 구 시가(거류지)로 제한되었다.
한편, 餘興은 제사의 일환으로 봉납의 의미가 강했다. 그런데 예제 기간 중의 여흥은 봉납의 의미에서 스포츠로, 전시 및 연주관람으로, 그리고 구경거리로 변모했다. 나아가 번화가의 상점들과 지역 단체들은 예제를 기회로 상공 진흥과 불경기 해소를 위한 ‘변천시’, ‘상공제’ 등을 개최하며 자본주의 문화와 결합된 거리 축제 또는 도시 축제로 만들었다. 하지만 일제 말기가 되면 전시체제로 말미암아 이와 같은 예제의 축제화는 조선총독부로부터 금지되고 ‘진정한 제사’로 전환이 시도되었다. 이때 진정한 제사는 전통적인 촌락의 제사가 아니라 천황에 대한 충성과 황국신민으로 자리매김하는 의례에 다름 아니었다.

목차

초록
1. 머리말
2. 용두산신사의 성립과 제전의 양상
3. 용두산신사 예제의 신행과 여흥의 의미
4. 맺음말
[참고문헌]

참고문헌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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