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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박순교 (육군 삼사관학교)
저널정보
동아인문학회 동아인문학 東亞人文學 第38輯
발행연도
2017.3
수록면
95 - 141 (47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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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7년 정월~8월 왕건은 경애왕과 합동으로 경북 내륙 일대를 점령했다. 그럼에도 이후 여덟 달에 걸쳐 당대의 무신(武神) 견훤은 침묵을 지켰다. 견훤의 침묵은 불안한 평화, 전쟁이 예견된 폭풍전야의 시간이었다. 그럴수록 고려에서 후백제로 파견된 세작(細作)의 활동이 없었을 리 없고, 탐마(探馬)가 없었을 리 없다. 주적(主敵) 견훤의 일거수일투족은 필시 왕건에게 보고되었고, 왕건은 삼국의 정황을 누구 보다 면밀히 꿰뚫었다고 여겨진다.
우려했던 견훤의 보복은 927년 9월부터 개시되었다. 견훤은, 왕건이 앞서 점령한 지역 일대를 겨냥했다. 즉 치열한 교전이 동일 전역(戰域)에서 시간상 교차(927년)한 셈이다. 한데 견훤의 반격이 개시된, 초미의 상황에서 신라의 구원 요청이 있기까지 왕건은 선제적 대응을 취하지 않은 채 시간을 끌었다. 심지어 기록에선 왕건이 견훤의 침습정보를 아예 인지하지 못한 듯 묘사되고 있다. 심지어 왕건은 경애왕의 구원 요청이 있은 후에조차 즉각 친정하지 않았다. 대신 뚜렷한 군공이나 무용조차 알려지지 않은 공훤을 주장(主將)으로 삼아 출정하게한 것이 대응이라면 대응의 전부였다. 한데 공훤이 거느리고 출병했다던 ‘경병(頸兵) 1(만)萬의 구원군’마저 경애왕 죽음의 순간까지 서라벌에 이르지 않았다. 출발은 있었으되, 도착이 없는 셈이다. 구원군의 궤적 등도 죄다 미궁에 빠져 있다. 일련의 사실들은 흔히 있을 수 없는 일로서, 저간의 의혹을 증폭시키기에 마땅하다.
기록상, 신라 왕도의 위기를 구하려 한 고려의 시도(파병)는 세 차례였다. 한데, 가장 출병 규모가 컸음에도, 유독 공훤이 통솔한 ‘경병 1만’만이 실패했다. 936년 신검과의 최후 회전(會戰)에서 공훤은 3군의 원병, 보급 역할을 맡았을 뿐 실제 전투에조차 투입되지 않았다. 당시 고려군 편제에서 확인되는 37명의 장수(견훤 제외) 중 공훤은 35번째로 거명되고 있다. 또 휘하의 기병 역시 불과 300이었을 뿐이다. 주장 공훤의 여러 전력을 살펴볼 때, 그는 위기를 타파하고 적선(敵線)을 허물며 돌격할 성정(性情)의 인물이 아니었다. 결국 왕건은 선택할 여러 경우의 수, 최적의 인물들 가운데 가장 묘연한 인물(공훤)을 택했다. 요컨대 경애왕 죽음의 일인(一因)에는 왕건의 방관, 심지어는 방조가 엿보인다. 왕건은 경애왕의 위기를 적극적으로 구하지 않았다. 외려 교묘한 방법으로 방관, 조장하였다. 이에는 1) 견훤에 대비(對比)한 군사의 열세, 2) 경애왕과의 미묘한 정치, 외교적 갈등, 3) 경애왕과 신라의 부흥에 대한 견제와 차단 4) 견훤에 의해 경애왕이 시해되었을 경우 이뤄질 민심의 극적 반전과 자신에게 떨어질 현실적 이득, 5) 새로 옹립될 신라왕의 정통성 한계를 이용한, 신라 지역 내귀부와 병합의 가속화 등 현실적 셈법이 작용하였다고 헤아려진다.

목차

〈국문초록〉
Ⅰ. 머리말
Ⅱ. 구원군 파병의 전후 상황과 의문
Ⅲ. 고려 1만 구원군의 종적
Ⅳ. 고려 구원군의 主將 문제
Ⅴ. 맺음말
【參考文獻】
〈Abstract〉

참고문헌 (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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