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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김명섭 (단국대학교)
저널정보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한국독립운동사연구 한국독립운동사연구 제59집
발행연도
2017.8
수록면
79 - 109 (31page)

이용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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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회영은 1919년 5월 상해에서 북경으로 돌아온 이래 6년 6개월동안 6번 이상 이사를 다니며 가난한 망명생활을 하였다. 북경에 머무는 동안 그는 극도의 가난을 겪었다. 이 기간 중 이회영은 류자명과 신채호 등과 교류하며 아나키즘 사상을 수용하였고, 다물단과 재중국무정부주의자연맹의 결성을 주도하여 아나키스트 독립운동의 방략을 세우는데 기여하였다. 하지만 아들과 딸이 친일밀정 김달하 처단사건에 연루되면서 가정의 큰 우환을 겪어야 했다.
이회영 일가는 1925년 11월 천진의 프랑스 조계지로 이주하여 1930년 12월까지 생활하였다. 이 와중에도 이회영은 최소 4번이상의 이사를 다니며 가난과 일제 감시 등 각종 곤란을 겪어야 했다. 그런 와중에도 그는 의열투쟁과 국제연대활동, 그리고 만주 독립기지 건설운동 등에 깊이 관여하였다. 이회영은 1926년 초 류자명으로부터 들여온 폭탄과 권총 등을 숨겨주어 나석주 의거가 가능하도록 도왔으며, 이 일로 인해 일본영사관의 추적을 피해 3개월 간 무전여행을 하며 극도로 곤란한 생활에 처하였다. 하지만 그는 국제연대 단체인 동방아나키스트연맹의 활동을 적극 후원하는 한편, 북만주의 신민부를 한족총연합회로 개편하여 독립기지를 건설하는 일에도 깊이 관여하였다.
이회영과 아들 규창은 1930년 12월 천진에서 상해로 이주하였다. 이후 이회영은 비밀결사인 남화한인청년연맹과 항일구국연맹을 통해 의열투쟁과 만주 유격대 건설의 방략을 모색하였다. 항일구국연맹의 의장을 맡았던 이회영은 일제 기관의 파괴와 요인 암살, 항일선전문 배포 등의 활동을 펼쳤다. 1932년 4월 일제의 상해 점령과 윤봉길 의거로 더 이상 활동하기 힘든 상황에 처하자, 그는 동북항일의용군과의 연계를 통해 만주로 진출해 의열투쟁과 유격대 활동을 펼치려 하였다. 하지만 밀정의 신고로 인해 1932년 11월 17일경 대련의 여순감옥에서 고문으로 인해 절명하고 말았다.

목차

1. 머리말
2. 이회영의 북경 정착과 독립운동 관계
3. 이회영의 천진 생활과 아나키스트 활동
4. 이회영의 상해 이주와 의열투쟁, 만주진출계획
5. 맺음말
참고문헌
국문요약
Abstra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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