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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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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저널
저자정보
구난희 (한국학중앙연구원)
저널정보
고구려발해학회 고구려발해연구 高句麗渤海硏究 第60輯
발행연도
2018.3
수록면
9 - 43 (35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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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발해 5개 교통로가 타자의 관점에 가려 그 실체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였다는 인식 하에 營州道를 새롭게 검토하였다.
우선, 영주도는 대당 사행로였고 8세기 중반 安史의 亂 이후 이 지역에 대한 당의 통제력이 상실되어 더 이상 이용되지 않았다는 해석에 의문을 제기하였다. 713년 당의 鴻臚卿 崔欣 파견시 행로가 營州道가 아닌 鴨綠道였다는 점으로 미루어 보아 발해 초기부터 영주도의 대당 사행로적 역할은 그리 크지 않았다.
영주도의 이해를 위해, 이것이 특정 시대의 일시적 운용 공간이 아니라 긴 역사시간 속에서 발전 계승된 과정을 다루었다. 발해는 이전에 형성된 營州로부터 遼河에 이르는 3路 중 북로를 중심으로 하여 遼河 新城으로부터 고구려 도성 集安에 이르는 2路를 통합하고 長嶺府에 이르는 길을 확장하였다.
발해의 영주도 운용 상황을 확인하기 위한 단서로 건국을 이끈 東走 이동로, 돌궐에 대한 흑수말갈의 吐屯 설치 요청, 馬都山 전투, 일본에 파견된 楊承慶과 高南申의 관직명에 나타나는 木底州와 玄菟州에 주목하였다. 뿐만 아니라 王進義의 발해 파견과 이를 확인하는 발해의 견사 또한 영주도를 통해 이루어졌을 것임을 지적하였다.
따라서 영주도의 단절과 무관심은 天門嶺 敗戰 이후 형성된 ‘王師道絶’의 기억을 과잉투영한 당 중심의 이해방식으로 재고가 필요하다. 즉 영주도는 대당 사행로보다는 당과 북방 제족의 성쇠를 판단하고 다원적 대외 교섭을 수행하는 교통로로 인식하여야 할 것이다. 왕사도절이라는 당의 안타까움은 오히려 발해에겐 영주도 활용의 명분이자 실익이었다.
나아가 영주도는 당의 통제력이 완화된 상황에서 발해가 요서는 물론 서역과 교섭하는 통로가 되어 발해의 국제성과 개방성, 다원성을 이끌어내는 중추 기반이 되었다. 비록 관련 사료의 부족으로 시론적 차원에 머물고 말았지만 향후 서역과의 통교 및 영주도 선상의 유적에 대한 고고 성과가 보완되기를 기대한다.

목차

국문초록
Ⅰ. 머리말
Ⅱ. 營州道 일대의 인문 · 자연 환경
Ⅲ. 營州道의 형성과 행로
Ⅳ. 발해의 營州道 운용
Ⅴ. 맺음말
참고문헌
Abstra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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