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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洪承賢 (昌原大)
저널정보
동양사학회 동양사학연구 東洋史學硏究 第142輯
발행연도
2018.3
수록면
25 - 69 (45page)
DOI
10.17856/jahs.2018.03.14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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有關北魏墓誌的定形化和流行相關的現有硏究可以理解為是將其視為北魏墓地發展的內發性延展的結果, 或視其為受到了南朝的影響。前者從胡族特有的虛葬、潛埋風俗遺制方面來掌握北魏墓地的情況, 而後者則則將其視為漢化實施的結果。但如果將北魏墓地理解為胡族特有的遺制, 那就難以對孝文帝以後葬俗雖發生了變化, 但墓志銘仍在盛行, 而且起到頌德作用的銘辭發達情況進行說明。實際上, 對十六國時期墓地與洛陽遷都以前北魏墓地的分析結果可知北魏墓地的定型化本身並非發展的結果, 而是受到南朝影響而形成的。
最近硏究推斷經當時逃到南朝的王肅將墓誌銘傳過來。但可以確認通過《北魏延興二年(472)申洪之墓誌》, 當時南朝墓地傳統已傳到了北方。總之, 北魏墓地是受到南朝影響而形成定型化的。那麼, 將北魏墓地視為漢化的結果是否妥當?為確認這一事實, 筆者對可視為洛陽遷都以後最初定型化的墓地《北魏太和十九年(495)馮熙墓誌》以及此後建造的墓地進行了分析。其結果可知北魏墓地到503年以後才形成定型化。雖是皇帝親自製作的墓志銘, 但卻難以找到相關證據表明當時北魏社會墓地使用是被強制性接受漢化政策而導致。
墓地中帶有銘辭受到重視意味著當時的社會開始對頌德表示關注。因而, 筆者欲通過本文發現北魏社會內部頌德變得重要的原因。筆者認為其原因正是由孝文帝主導推進的定姓族措施。一般認為定姓族是門閥主義的錄用, 但北魏的門閥主義與南朝的門閥主義所不同的是, 作為私人特權的爵的權限被皇帝所掌控, 並運營了將能力和政績作為標準的考課制度。從定姓族的重要標準之一即所持有的官位高低這一點可知該政策的性質。從而, 可知北魏社會是需要制定並實施可宣傳門第的威望, 且可彰顯個人政績的制度。這應該就是備有以頌德爲目的銘辭的墓地出現並流行的理由。

목차

머리말
Ⅰ. 平城時期 墓誌의 구성과 특징
Ⅱ. 北魏 墓誌의 정형화
Ⅲ. 洛陽 遷都 후 墓誌 구성의 변화와 원인
맺음말
참고문헌
中文摘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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