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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정연학 (국립민속박물관)
저널정보
서울민속학회 서울민속학 서울민속학 제5호
발행연도
2018.12
수록면
87 - 151 (65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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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남산 국사당은 초제, 즉 별을 보고 제사를 지낸 장소로 산봉우리 정상에 있다. 따라서 국사당은 무격을 모신 본래 당집이 아니었으며, 산신당·성황당·서낭당과 그 성격이 엄격히 차이가 난다.
남산 국사당은 조선시대 국가 제의 소사(小祀)에 포함되어, 일반인의 접근과 제사지내는 것을 금지시키었다. 태조는 남산을 ‘목멱대왕(木覓大王)’으로, 대종은 남산[木覓山]을 감악산(紺岳山)木覓 祠덕적산(德積算)과 함께 ‘삼성(三聖)’으로, 세종은 신주(神主)를 모신 남산 국사당을 ‘목멱사(木覓祠)’라고 불렀다. 그러나 1484년(성종 15) 국사당 관리인이 장군과 승려 인형을 목멱사에 봉안하고, 19세기 전반에는 무학대사, 나옹, 마마호구신, 그 밖의 무신 등을 섬기는 등 국가 제의와 무속인의 신앙 행위가 국사당에서 병행되었다. 1925년 국사당이 남산에서 인왕산으로 이전 후에는 태조 이성계와 부인 강씨, 민중전[민비], 단군 등의 새로운 신상이 봉안되었고, 국사당 소유가 국가에서 개인으로 바뀌면서 현재는 서울의 대표적인 굿당으로 자리 잡았다.
인왕산 국사당은 1925년 7월 남산의 국사당을 이전하여 원형 복원하였다. 그 건물은 현재 ‘중요민속자료 제28호’로 지정(1973.7.16) 되었으며, 국사당 내 무신도(21점)와 무구(7점)는 국사당 건물 보다 앞서 ‘중요민속자료 제17호’(1970.3.24)로 지정받았다. 국사당 건물의 본체 전면 3칸[마루]은 남산 국사당이 이전할 때 해체된 목재를 가져다가 그대로 재연한 것이지만, 좌우측 방 2칸은 1965~1970년 사이에 증축된 것이다. 그리고 무신도는 19세기 이규경의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 근거해, 19세기 전반에 준화원(準畵員)급의 화가가 그린 우수한 그림으로 평가하고 있다. 그러나 석남 송석하(1904~1948)가 수집한 서울 인왕산의 국사당(國師堂) 내부 흑백사진이나 일본 동경에서 국사당이 인왕산으로 옮기기 전 사진이 발견됨에 따라 현재 인왕산의 무신도가 1925년 이후의 것임이 판명되었다. 즉, 남산 국사당 내부의 6점의 무신도는 족자형태이고, 사진에 보이는 6점의 그림도 인왕산 국사당의 무신도에서 찾아볼 수 없다. 또한 인왕산 국사당의 무신도의 크기나 화풍이 일치하지 않는 것도 무신도가 지속적으로 바뀌었음을 말해준다.

목차

국문초록
1. 머리말
2. 국사당(國師堂)과 국무당(國巫堂)의 개념
3. 남산 국사당의 전신, 목멱사(木覓祠)
4. 인왕산(仁旺山) 국사당(國師堂)
5. 맺음말
참고문헌
ABSTRA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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