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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정보
저널정보
중국사학회 중국사연구 중국사연구 제116호
발행연도
2018.1
수록면
111 - 132 (22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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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76년 왕안석은 재상에서 물러나 고향인 강녕부로 내려갔다. 강녕부는 그가 제2의 고향이라 여기던 곳이다. 그는 白塘이란 곳에 거처를 정하고 이곳에 반산원이란 거처를 지었다. 반산원은 대단히 누추한 집이었다. 성내로부터 7리나 떨어져 있었다. 하지만 반산원 주변에는 많은 경승지가 있었다. 반산원으로부터 성내의 반대편에 위치한 鍾山은 울창한 수림과 수많은 유적지를 자랑하였다. 孫陵(孫權墓), 謝公墩, 淸凉寺, 寶公塔 등이 종산 주변에 분포하였다. 이밖에 秦淮河라든가 定林寺, 八功德水 등이 모두 반산원으로부터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만년의 왕안석은 종산 인근의 대자연 속에서 유유자적하는 생활을 보냈다. 강녕부 은퇴기는 왕안석의 생애 가운데 詩作이 가장 풍부한 시기이다. 그는 자연을 벗 삼아 살아가며 강녕부 일대의 四季를 소재로 아름다운 시를 남기고 있다. 왕안석은 은퇴하여 강녕부에 거주하고 나서 강녕부 바깥으로는 단 한 번도 나가지 않았다. 친지를 만나기 위해 여행한 적도 없었다. 오로지 강녕부와 종산을 무대로 하여 생활할 뿐이었다. 그런 까닭에 자연히 交遊의 범위도 제한될 수밖에 없었다. 종산 인근에 거주하던 지역의 지식인들, 그리고 산사의 佛僧이 교왕하는 지인의 전부였다. 만년의 왕안석이 어울렸던 강녕부의 지식인과 불승은 상당수에 달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외에 타지에서 이따금 그를 찾아오는 사람이 있었다. 그런 인물 가운데 대표적인 사람이 呂嘉問과 蘇軾이다. 소식은 정치적으로 왕안석의 반대편에 섰던 구법파 인물이었다. 하지만 왕안석이 재상에서 물러나 현실 정치로부터 발을 떼고 있었기에, 정치적 입장의 차이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왕안석은 멀리서 자신을 찾아온 소식을 매우 반갑게 맞이했다. 1085년 북송의 정계에 커다란 변동이 일어났다. 다름 아니라 왕안석을 발탁하여 신법을 지지하고 후원하였던 황제 신종이 1085년 3월 붕어하였던 것이다. 바로 이 시기 왕안석이 와병하였다. 그의 병세는 날이 갈수록 악화되어 갔다. 그리고 1086년 4월 왕안석은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는 향년 66세를 일기로 작고하여 부친과 모친, 그리고 아들 王雱의 곁에 묻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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