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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정보
저널정보
국민대학교 한국학연구소 한국학논총 한국학논총 제29권
발행연도
2007.1
수록면
473 - 502 (30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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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사할린 한인의 ‘이중징용’의 배경과 강제성을 규명한 것이다. 일반적으로 사할린 한인의 ‘이중징용’이라면, 1944년 사할린의 한인탄광부들이 일제의 강제 명령에 의해 일본 큐슈와 이바라키 등지로 이동한 것을 말한다. 이때 강제 이동된 한인의 수는 대략 3천여 명 규모로 알려지고 있다. 일제가 1944년 8월 사할린 탄광을 폐지․휴지시키고, 한인 탄광부를 일본 본토로 강제 이동시킨 것은 ‘각의’의 결정에 따른 것이었다. 당시 패색이 짙던 일제는 마지막 발악으로 본토 사수 작전을 꾀하였다. 1944년 7월 28일 일본 대본영 육해군부는 ‘육해군의 향후 작전지도 대강’을 결정하고, 다음의 결전을 본토, 남서제도, 대만, 필리핀 방면으로 예정하고 미군이 이 방면으로 공격해 올 때를 대비하여 첩호작전을 계획하고 있었다. 첩1호는 필리핀, 첩2호는 남서제도와 대만, 첩3호는 본토, 첩4호는 치시마 및 홋카이도에서의 작전으로, 최후의 결전을 맞이해 갔다. 이는 8월 11일 일본 각의에서 ‘이중징용’을 결정하기 보름전의 전황이었다. 그같은 상황에서 일제는 사할린 지역을 최후 방어선에 제외시키며, 본토의 전력을 증강시키기 위한 전략으로 사할린 탄광을 폐쇄시키는 한편 일본 본토로의 ‘이중징용’을 결정하였다. 즉 패전을 목전에 둔 상황에서 사할린 석탄수급이 어려워지자, 본토 사수를 위한 고육책으로서 사할린 서북부의 탄광을 폐지 내지 휴지하고, 그 인력과 자재들을 본토로 강제 이동시킨 것이었다. 사할린 한인의 ‘이중징용’은 일제가 본토 옥쇄작전을 수행하기 위한 방편의 하나로 추진한 것이었다. 사할린 한인 탄광부의 ‘이중징용’은 군사작전을 방불케 할 정도로 일사불란하게 실시되었다. 그렇게 3천여 명의 한인이 사할린을 떠나 큐슈와 이바라키 등지로 강제 동원되어 갔다. 강제적 이중징용은 그들만에 그치지 않았다. 정확한 숫자가 확인되지는 않지만, 치시마 열도의 비행장 건설현장이나 국경의 진지구축에 동원되기도 했다. 그 과정에서 희생자도 적지 않게 발생하였다. 큐슈나 이바라키 등지로 ‘이중징용’된 한인들은 더욱 혹독한 환경에서 시달려야 했다. 그래서 이들은 도중에 탈출을 시도하기도 하고, 극심한 노동을 이겨내지 못한 채 사망하는 경우도 있었다. 사할린에 가족을 두고 온 경우는 가족들에 해가 미칠까 탈출을 아예 꿈꾸지도 못하였다. 그러나 일제가 패망하고 사할린으로 가는 길이 막히면서, 고통보다 더한 생이별의 절망에 부닥쳐야 했다. 일본에서 사할린으로 가지 못하는 아버지나 남편의 절망도 형언할 수 없었지만, 사할린에 남은 가족들은 기아와 극심한 생활고라는 현실이 겹쳐지면서 더욱 힘든 삶을 보내야 했다. 1946년 사할린의 식량난이 극심한 가운데 수많은 어린 아이들이 굶주림을 견디다 못해 사망하는 일도 많았다. 또한 혼자가 된 젊은 여성들을 하는 수없이 현지에서 다시 가정을 꾸릴 수밖에 없었고, 그 과정에서 가정이 해체되는 아픔을 겪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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