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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널정보
고려대학교 역사연구소 史叢(사총) 史叢(사총) 제94호
발행연도
2018.1
수록면
223 - 256 (34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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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에서는 청말에서 중화민국에 걸쳐 조선에 파견된 영사관원의 이력과 활동을 마영발(馬永發, 마용파)을 중심으로 서술하였다. 그는 38년 동안 주조선 영사관원으로 근무하면서 그중에서 28년을 원산부영사로 재직한 독특한 이력을 갖고 있었다. 본고에서는 특히 기존 연구에서 활용되지 않은 양소권(楊紹權, 양사오취안)과 왕영진(王永晉, 왕용진)의 회고록을 같이 검토하였다. 우선, 마영발의 이력과 관련하여 그의 인적 네트워크에 주목하였다. 그는 광동(廣東) 한군기인(漢軍旗人) 출신으로 신식학당을 졸업하고 주독공사관 근무를 거쳐 1907년 조선에서 업무를 시작하였다. 이 과정에서 주독공사를 지낸 양성(楊晟, 양성), 주한총영사로 내한한 마정량(馬廷亮, 마팅량)과의 인척 관계가 중요한 작용을 하였다. 마영발은 원산부영사로 부임한 뒤 관내 화교사회의 신임을 얻었고 청국조계의 화교 토지 영대차지권(永代借地權)을 확보하는데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 둘째, 두 차례 영사관 조직 개편 과정에서 그의 활동을 구체적으로 살펴보았다. 첫 번째로 1927년 중화민국 외교부는 경비 부족을 이유로 진남포와 원산부영사관 업무를 잠정 중단하기로 결정하였지만, 마영발의 신속한 조치로 원산부영사관은 철폐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두 번째로 마영발은 청진영사관 개설을 적극 제안하여 1930년 영사관 설립과 동시에 청진영사로 부임하였다. 그러나 일본측의 승인을 받지 못하자 청진영사관은 2년 뒤 원산부영사관의 지휘를 받는 판사처로 개조되었는데 이 과정에서도 마영발의 의견이 중시되었다. 마영발은 형식상으로 청진영사의 직을 유지하면서 원산부영사를 겸임하였다. 청진영사관은 결국 1936년 7월 조선군의 청진영사관 습격 사건을 계기로 폐쇄되었지만, 마영발은 이 사건에 대해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았고 원산부영사의 직도 그대로 유지하였다. 마지막으로, 중일전쟁 발발 이후 마영발을 비롯한 영사관원이 중화민국임시정부에 참여하게 된 상황을 재구성해보았다. 임시정부 참여를 주도한 경성총영사 범한생(范漢生, 판한성)은 잘 알려진 친일파였다. 범한생의 요구에 따라 총영사관에 임시정부의 오색기를 게양하는 과정에서 대부분의 영사관원은 저항했지만 끝까지 거부하지 못했다. 임시정부 참가에 반대하여 귀국한 영사관원은 중경의 국민정부에 합류하지 못하고 상해에 남아야 했고, 왕정위(汪精衛, 왕징웨이)가 상해를 접수한 이후 또 다른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되었다. 마영발은 임시정부와 왕정위국민정부에서 신의주영사, 경성총영사를 역임한 뒤 전쟁이 종결되기 1년 전에 귀국하였다. 종전 이후 조선에 남아있던 영사관원은 거의 대부분 ‘한간’으로 소환되어 재판을 받았지만 그는 이러한 상황도 피해갈 수 있었다. 그의 독특한 이력과 활동은 중국, 러시아와 국경을 접하고 있는 식민지조선의 특수한 상황 하에서 가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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