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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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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저널
저자정보
저널정보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원 동양학 동양학 제67호
발행연도
2017.1
수록면
67 - 89 (23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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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고는 금과 고려의 관계에 대한 연구를 하는데 있어 가장 먼저 언급되는 금나라 황실 시조의 출신에대해 기존의 견해들을 재검토하고 새로운 견해를 제시한 것이다. 기존에 이를 연구한 일본, 중국, 한국의 학자들은 각국의 정치적 입장 속에서 주관적으로 이를 해석하는 경향이 있었다. 또한 기존의 연구들은 금나라 황실 시조의 출자지로 기록된 ‘신라’와 ‘고려’를 동일선상에서 해석했지만 실제 사료에서 ‘신라’와 ‘고려’로 달리 기술된 것은 다른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우선 금나라 황실 시조의 출자지를 ‘신라’라고 기록한 문헌들 대부분은 송나라 사람들이 저술한 것으로 대개홍호의 『송막기문(松漠紀聞)』을 보고 기술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송나라 사람들은 이전부터 여진지역을 신라로 비정하고 있었는데 이는 ‘편칙(編勅)’의 내용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또한 허항종의 『선화을사봉사금국행정록』에는 여진의 땅에 여진인들이 불렀다는 ‘신라산(新羅山)’에 대해 기술하고 있다. 신라산이란 지명이 대개 신라인들이 모여 살던 곳에 보이는 지명인 점을 통해 볼 때 이 신라산의 주변에도 신라인들이 집단으로 거주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이 여진지역에 있던 ‘신라산’의 주위에 거주하던 신라인 ‘함보’가 금나라 완안부의 시조가 되었다고 생각된다. 이와 달리 『금사』와 『고려사』에서는 금나라의 시조가 ‘고려’ 출신이라고 기술하고 있다. 『금사』에서 시조를‘고려’ 출신이라고 한 것은 발해 유민들과의 융화를 위함이었다고 보인다. 이와 달리 『고려사』의 기록에서 당시 완안부의 수장들이 자신들이 ‘고려’로부터 나왔다고 한 것은 9성을 돌려받기 위한 것과 같은 외교 교섭을위한 정치적 수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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