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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저널정보
한국불교미술사학회 강좌 미술사 강좌 미술사 제35호
발행연도
2010.1
수록면
29 - 68 (40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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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의 왕뿐만 아니라 역대 왕 가운데 가장 많은 어진을 남긴 왕이 경순왕이다. 경순왕은 나라를 빼앗겼지만 오히려 사람들의 칭송을 받은 매우 예외적인 경우이다. 그것은 기울어가는 국운을 파악하고 백성들을 보호하기 위해 정권을 고려 태조에 평화적으로 넘겼다는 점이 높이 평가받은 것이다. 신라말 고려초에 경순왕영정은 3벌이 제작된 것으로 확인된다. 하나는 장자인 마의태자 일왕자가 금강산에 가져간 것이고, 다른 하나는 차자인 황왕자가 해인사에 봉안한 것이며, 나머지 하나는 삼자인 명종왕자가 경순왕이 돌아가신 뒤 신라 유민들과 더불어 고자암에서 영정을 제작케 한것이다. 마의태자가 지니고 간 경순왕영정은 지금 행방을 알 수 없고, 황왕자가 해인사에 모신 경순왕영정은 은해사 상용암에 봉안되다가 다시 모사를 거쳐 경주 숭혜전에 이안되고 이는 다시 이명기가 그린 <경순왕영정>, 이진춘이 그린 <경순왕영정>으로 제작되었다. 이명기의 작품은 두 벌이 제작되는데 한 점은 경주 숭혜전, 다른 한 점은 하동 경천묘에 봉안되었다. 명종왕자가 모신 고자암의 <경순왕영정>은 1677년 모사되고 이는 다시 경주 숭혜전으로 옮겨졌다. 결국 두 왕자가 모신 경순왕영정과 그 모사본은 경주 숭혜전에 봉안하게 된 것이다. 흥미로운 점은 세 왕자가 중심이 되어 제작된 경순왕영정이 모두 사찰에 봉안되었다는 사실이다. 마의태자가 가져간 것은 금강산 고자암, 황왕자가 가져간 것은 해인사, 명종왕자가 중심이되어 제작한 것은 원주 고자암에 모셔졌다. 사찰에 어진을 봉안하는 방식은 신라시대부터 이어져내려온 전통이다. 경주 숭혜전과 하동 경천묘에 소장된 경순왕영정은 조선시대 경순왕영정의 역사적 변천을파악할 수 있는 자료들이 모여 있는 일괄 유물이다. 어진의 남아 있는 예가 적은 상황에서 경순왕영정은 궁중뿐만 아니라 사찰의 어진의 면모를 살펴볼 수 있는 중요한 유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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