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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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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저널
저자정보
저널정보
한국불교미술사학회 강좌 미술사 강좌 미술사 제50호
발행연도
2018.1
수록면
151 - 178 (28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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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문사에 소장된 공예품 가운데 작압전 출토 사리장엄구 일괄은 1987 년 10 월 작압전 해체 복원당시 이곳에 봉안되어있던 석불좌상의 대좌 아래에서 발견된 것이다. 납석제 유개원합, 청동제 사리병, 숭덕칠년명 유제 뚜껑, 영락통보, 원형대소환옥, 소석편으로 구성되었다. 납석제 유개원합에 새겨진 명문을 통하여 사리합은 당시 탑에 2 과의 사리를 안치하고자 통일신라 경문왕 5 년인 865 년에봉안된 것으로서 납석제로 제작된 점에서 통일신라 9 세기 중엽에 만들어진 일련의 신라 하대 사리기와 연맥을 같이한다. 안치된 청동제의 사리병은 고려 초기에 그 예가 많다는 점에서 이 사리병의제작 시기에 대해서는 좀 더 검토가 요구된다. 또한 숭덕 7 년의 명문을 지닌 유제 뚜껑을 통해 조선시대 1645 년에 작압전에 대한 세 번째의 중수가 이루어졌으며 시주를 했던 10 명의 명단과 대목의인명이 확인되어 조선중기 이후 운문사 중수 공사의 세세한 일면을 파악할 수 있다. 영락통보 동전이함께 발견되는 것은 단순한 공양구라기 보다 중수 당시의 기념적 유물을 함께 넣은 것으로 짐작된다. 특히 운문사 사리기를 보호한 석조 사리외함이 운문사 작탑과 유사한 분황사 전탑 사리기 외함과달리 백제식의 지하식 사리 장엄 방식을 따른 점에서 원 작압전의 건축 시기가 지금 알려진 것보다훨씬 앞설 가능성도 제기된다. 운문사 공예품 가운데 가장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 청동 항아리는 지금까지의 용도와 달리 뚜껑 위에 장식된 독특한 화염 보주형으로 미루어 사리기 내지 경통처럼 사리와 관련된 보관용기로 쓰였을 가능성을 제시해 보았다. 여기에 1067 년에 중수되었다는 명문의 내용은 이 화염보주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것이라 추측되며 몸체는 그 이전에 만들어진 것으로 볼 수 있다는 점에서 통일신라에 제작되었을 가능성이 있음을 밝혀보았다. 이 밖에 운문사 옥등은 비록 명문은 없지만 고려 후기의 작품으로 추정할 수 있었다. 불연은 바닥에 기록된 조련기의 분석을 통해 1688 년에 중하연으로 만들어진 것임을 알 수 있으며 연을 제작한사람은 화원 정심(淨心)이란 승장으로 파악되었다. 당시 연을 만들 때 조역승 200 여명이 동원된 사실을 기록하여 운문사의 사세 뿐 아니라 불사에 많은 승려들이 동원되고 있음을 살펴볼 수 있었다. 전패는 조선후기 명문 있는 불전패와의 비교를 통하여 17 세기 후반쯤 제작된 삼전패(三殿牌) 가운데 하나일 가능성을 제시해 보았다. 또한 묵서명이 기록된 1682 년에 이말남(李唜男)에 의해 만들어진 목조 대경함과 1688 년에 만들어진 목조경상은 조선 후기 사찰 목공예품의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명문이 남아있지 않은 운문사 대종의 제작 시기는 19 세기 전반에서 중엽 쯤, 목어 역시 그와 유사한 19 세기 정도로 편년되었다. 운문사의 불교공예품은 비록 그 수량은 많지 않지만 통일신라의 사리장엄구와 청동 항아리와 같은 우리나라 공예사 연구에 빼 놓을 수 없는 매우 귀중한 작품이 남아있다는 점에서 운문사가 지닌비중을 증명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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